[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31

16 “여러분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하니 17 이 어리석고 눈먼 사람들아.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황금입니까? 아니면 그 황금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입니까? 18 또 여러분은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하니 19 이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합니까? 제물입니까? 아니면 그 제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입니까? 20 사실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한 맹세이고 21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며 22 또 하늘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한 맹세입니다.”(마태오 23,16-22)

세번째 저주인 본문에서 16절은 특이하다. 다른 저주에 모두 나타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라는 말이 빠졌다. 그 대신 ‘눈먼 지도자들아’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마태오 15,1.14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를 가리키던 표현이다. 그들 뿐 아니라 마태오 공동체를 겨냥하는 경고인가. 실제로 마태오 공동체에서도 맹세가 행해진 것 같다. 맹세를 아예 금지한 예수의 말씀과 명백히 어긋난다.(마태오 5,33-37) 마태오 공동체에 성서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 성서가 탄생한지 2,000년이 다가오는 지금도 신도들의 성서교육은 여전히 부실하다. 마태오 공동체가 예수의 당부를 온전히 실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초대교회를 환상적인 모범으로 보는 그리스도교 일부의 시각은 타당하지 않다.

예수는 시각장애인을 언제나 고쳐 주었다. 그 치유에는 정신적 깨달음도 포함된다.(마태오 9,27-31; 11,5; 12,22-24) 치유 이적의 대부분은 장애인들과 연관되는 사례였다. 예수의 시각장애인 치유행위를 바리사이들은 두 번이나 거부하고 악마의 일로 깎아내렸다.(마태오 9,34; 12,24) ‘눈먼 길잡이’(마태오 15,14)에는 시각장애인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다. 선교활동에서 생긴 단어 같다.(로마 2,19) “남을 가르치면서 왜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못합니까?”(로마 2,21)라고 바울은 선교사들에게 경고한 바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제일 먼저 설교해야 한다. 설교를 들어야 마땅할 사람들이 되레 마이크를 움켜쥐는 경우가 많다.

거룩한 야훼의 이름을 존중하는 뜻에서 유다인들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대신 하늘, 예루살렘 등 다른 것을 들어 다양하게 맹세하였다.(마태오 5,34-36) 그러다가 일탈사례가 나타났다. 야훼를 두고 한 맹세가 아니니 맹세를 지킬 의무가 없다는 식이다. 당시 유다사회뿐 아니라 그리스 사회에서도 각종 맹세가 유행하였다. 유다교 랍비들도 헛된 맹세의 위험을 모르지 않았다. 유다교에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없던 것처럼 추측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수가 유다교에게 하는 경고 대부분은 이미 유다교의 자기비판에서 풍부히 발견된다.

16절을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다.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 형식은 아직까지 유다교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성서 메시지에 집중하자. 성전에 황금을 두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 아닌가. 황금을 존중하는 태도가 이미 불경스럽지 않는가.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오 6,24)는 경고는 조용기나 로버트 슐러 뿐 아니라 예수가 당시 사람들에게도 하신 것이다. 예수를 팔아서 돈 번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기대하시라. 바리사이 학파들 사이에서도 맹세의 효력과 위험에 대해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제단과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킬 의무가 있다고 유다인들은 생각하였다. 예수는 그러한 맹세 관행에 반대하였다. 유효한 맹세와 그렇지 않은 맹세를 구분하지는 않았다. 21절 이하에서는 성전, 하늘, 하느님이 일치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성전과 하늘은 하느님에게 속한다.(시편 26,8; 이사야 66,1)

예수가 금지한 표현인 ‘어리석은 사람’(마태오 5,22)이 17절에 보인다. 마태오가 잠시 착각하였나? 마태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신약성서 저자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형제여’ 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가르치는 그리스도교 아닌가. 그리스도교가 스스로 자기 품위에 걸 맞는 처신을 하면 좋겠다. 유다인에게 진심으로 죄송스런 구절이 성서에서 한두 군데가 아니다. 유다인에게 신약성서를 읽어보라고 권유할 때 나는 적지 않게 민망하다.

오늘 본문은 교회사에서 그리스도교에게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다. 마태오 공동체 뿐 아니라 오늘 가톨릭에서도 맹세는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성서의 충격적인 메시지는 제일 먼저 교회 안에서 흔히 무시되기 십상이다.

‘눈먼 인도자들’이란 표현은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정치인에게만 해당되지도 않는다. 진실을 보고도 알리지 않는 언론인,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섬뜩한 표현이다. 불의한 권력에게 자발적으로 다양하게 협조하는 그들이 안타깝다. 자신의 삶으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비하하는 눈먼 인도자들이 불쌍하다.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배울까. 진실만을 말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맹세 여부와 관계없이 진실만을 말하라는 것이다. 맹세를 거부한 것이 거짓말 면허증을 받은 것도 아니다. 언론인, 종교인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맹세할 때 하느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맹세할 때 하느님이 이미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한다. 모든 맹세는 하느님이 그 증인이시다. 혼잣말을 할 때에도 둘이 대화할 때도 하느님이 증인이시다. 청문회에서 증언할 때에도,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국민들 앞에서 선서할 때에도 하느님이 증인이시다.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 빌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 어디 빌 곳도 없다. 하느님께는 돈도 인맥도 직분도 아무 것도 통하지 않는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