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조현철 신부]

오늘, 성탄의 주인공은 물론 아기 예수입니다. 헌데, 주인공이긴 하지만 아주 특이한 주인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공 예수가 무엇을 하는지 바라보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갓난아기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는 것 외에? 갓난아기, 예수는 그냥 포대기에 싸여서 구유에 뉘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사실은 무엇을, 굉장한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기입니다. 엄마가 저를 객지에 낳고, 엄마, 아빠가 모두 어쩔 줄 모르시네요. 저를 누일 곳을 찾아 헤매다, 간신히 여기 마구간의 구유를 얻어서 들어왔어요. 저를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기 예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온 몸으로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응답하면서, 예수의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들도 그 중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김용길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지난 10월 31일,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33살의 최종범 씨는 자살을 했습니다. 다음은 최종범 씨가 남긴 유서입니다.

“저 최종범이 그 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최종범 씨는 본인과 동료들에게 강요되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항의로 목숨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지요. 며칠 전인 12월 21일, 노사타협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유족들과 대책위는 장례를 미루고 고인의 명예회복과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장례를 거부하고, 엄동의 혹한 속에서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 투쟁을 했었습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이제, 엄마와 돌이 채 안 된 딸, ‘별’이만 세상에 남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별’, 그 ‘별’이 자신의 온 몸으로 말합니다. “제 아빠는 일하시다 너무 힘들어서, 다른 사람들 고생하는 것을 보는 것도 힘들어서 자살을 선택했대요. 이제 저는 아빠가 없어요, 그렇게 든든했던 아빠가.”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홀로 남은 저를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모든 아기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보호자입니다. 아기 예수에게도, 아기 ‘별’에게도, 가장 절실한 것은 보호자입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기들의 말없는 요청이 사람들을,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아기의 요청에 응답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아기의 보호자가 됩니다. 누가 아기 예수의 보호자로 나섰습니까? 먼저, 마리아! 마리아는 아기 예수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열 달간 자신의 몸 속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 요셉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진 마리아의 보호자가 되어주었고, 마리아가 보호하는 예수의 보호자도 되었습니다. 해산을 앞두고 베들레헴으로 간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객지에서 아기가 태어납니다, 예수. 이제는 이들 모두가 보호자가 필요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누가 이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나요? 오늘 이야기에서 추측해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구유를 내 준, 마구간 주인일 겁니다.

이렇게 보호자가 된 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에이, 내가 무슨 보호자? 그러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럼,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준비가,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아직 혼인을 하지 않은 처녀 마리아, 아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요셉, 마리아를 맞이할 준비만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마리아가 잉태를 했습니다. 생각도 못한 아기에 대한 준비가 거의 없었을 겁니다. 객지에서 해산을 젊은 부부와 맞닥뜨린 마구간 주인도 경황이 없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비워있는 말구유 하나를 내어주는 것. 보통 때는 정말 하찮은 구유지만, 머물 곳도 없이 아기를 낳아 어쩔 줄 모르는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정말 소중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 요셉, 마구간 주인, 이들 모두는 그때 그대로의 상태에서 곤경에 처한 상대방의 필요에 응했던 겁니다. 그렇게들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보호자가 되기 위해 따로 특별한 무엇을 준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때 그때,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해 상대의 필요에, 상황의 요청에 응하는 것, 보호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건입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찾아가는 마음, 그와 함께 머물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마음, 바로 고통의 공감, 연민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려고 나설 때, 도움을 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놀라우리만치. 이것이 바로 아기의 힘, 무력함의 기적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주인공, 아기 예수가 한 놀라운 일입니다.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농성이 한창이던 지난 12월 13일, 신촌의 예수회 센터 2층에서 난데 없이 돌잔치가 열렸습니다. 바로, ‘별’이의 돌잔치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빠의 장례도 미루고 농성과 시위를 하는 판에 무슨 돌잔치냐고 했지만, 결국 누군가의 제의로 돌잔치가 추진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계획되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별’, ‘별’이 엄마와 함께 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갓 일 년을 산, 아빠가 세상을 떠나버린 지도 모르는, 아직 아무런 힘도 없는 아기 ‘별’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습니다.

▲ 별이. (사진제공/민중의 소리)

‘별’의 힘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움직였으니 말입니다. 천안센터에 근무하는 동료들, 이제는 자기들이 ‘별’이 아빠가 되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노조, 비정규직지회는 ‘별’을 위해 차를 선물하기로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알고 보니, 성능이 엄청나게 뛰어난 유모차였습니다. (아산공장 노조는 실제로 자동차 한 대를 선물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돌잡이가 끝난 후, 박재동 화백은 ‘별’이와 ‘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그려주었습니다. 그날, 저는 세상에 가장 따뜻하고 감동스러운 초상화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거기 있던 우리들은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별’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별’이와 함께,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거기 모인 우리 모두는, 각자가 할 수 있는 한, 세상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만큼, 우리는 변화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에,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그런 따뜻한, 아름다운 변화가.

이 세상에는 주위의 관심과 지지와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 모두 우리 시대의 아기들입니다. 송전탑 건설로 사라질 자신의 집과 논과 밭을 지키려는 밀양의 노인들, 부당한 해고로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채 수년씩 길바닥을 헤매고 다니는, 너무나 억울한 해고노동자들,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지내다, 막상 대학에 들어와서 사회에 어떻게 진입할지 몰라 좌절하고 방황하는 우리의 젊은 학생들, 이 밖에 각자의 사연을 지닌, 수많은 아기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안녕들’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도 한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솔직히, 우리들도 모두 안에 아기 하나씩 품고 살고 있지 않나요? 우리는 보호자로 요청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또한 다른 이들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아기이기도 합니다. 헌데, 말하지 않으면 이걸 서로 알 수가 없습니다. ‘안녕들’하냐고 물어야 할 필요가, 그 물음에 솔직히 응답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그렇게 물어보고 대답할 때, 그 옛날 아기 예수가 마리아와 요셉과 마구간 주인을 움직였듯이, 오늘 ‘별’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듯이,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움직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킬 겁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겁니다, 따뜻한 온기가 도는 그런 세상으로.

‘별’의 돌잔치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공감과 연민의 마음, 연대의 마음이 흐르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말로 생계를 좌우하는 해고가 정당화되고, ‘고독사’라는 생소한 말이 현실이 되는 걸 보면서, 현재의 흐름을 그냥 방치하면,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의 냉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얼어붙고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들 속의 아기들을 꺼내 서로에게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움직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서로 변화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켰으면 좋겠습니다.

 ⓒ한상봉 기자


성탄인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방식이 ‘아기’였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자, 여기에 아기 예수가 있다, 아무 힘도 없는. 어떻게 할래? 받을래 말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거시는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그렇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자, 여기에 ’별’이 있다. 받을래 말래?” 하느님께서는 이 제안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특정한 종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특정한 종류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처녀 마리아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셉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마구간 주인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제안을 못 본 척 하는 사람들도,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차없이 아기를 없애버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하느님의 제안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속내를 환히 내보여줍니다.

하느님이 아기로 우리에게 오시는 뜻을 새롭게 기리는 오늘, 성탄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을,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청합시다. 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그런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참된 사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용기를 청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성탄은 우리 모두에게 진정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구세주께서 아기로 오신 성탄을 축하합시다.
기쁜 성탄,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조현철 신부 (예수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