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28] 루카 16,19-21

철도 문제에 대해서 정부와 노동조합 사이에, 더 나아가 국민들 사이에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맞선다기보다는 어쩌면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엊그제 보도를 보니 코레일이 노동조합에게 몇 십억에 해당하는 소송을 제기했다고 하니 주눅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가 정부는 노동조합의 쟁의행위가 불법이므로 엄단하겠다고 하니, 어찌 첨예하게 맞선다고 하겠는가. ‘맞선다’고 할 때에는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니 말이다.

정부는 ‘민영화’가 아니라고 하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무조건 싫어하는 시민들은 노동자들의 쟁의행위를 ‘이기주의’ 쯤으로 치부하려 한다. 반대로 노동조합과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민영화’로 가는 길에 다름 아니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자칭 주류언론은 거의 일방적으로 정부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보도(?)하고, 노동자들의 쟁의행위 때문에 어떤 비상의 일이 벌어지는지를 친절하게 널리 알림으로써 시민으로 하여금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민영화와 관련해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재화’의 성격과 관련한 것이다. 어느덧 모든 재물이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진 우리의 처지, 곧 뼛속까지 자본주의, 시장주의, 자유주의에 물든 우리의 처지에서, 굳이 재화의 성격을 따지는 것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기야 인간의 ‘노동’까지도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쯤으로 취급받고(노동시장), 사람이 있기도 전에 거기에 있었던 ‘땅’까지도 돈벌이의 무엇이 되고(부동산시장), 구매력과 물물교환의 수단에 불과했던 화폐가 막대한 이윤을 내는 상품이 된(금융시장) 이 시절에 시장에 내다놓고 사고팔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할 것이다.

물론 이 자본주의, 시장주의, 자유주의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사실 이 자본주의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 비하면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짧은 역사를 갖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성을 갖고 경험을 통해 지혜를 축적하는 사람이라면, 주변을 둘러보고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모든 재화를 시장에서 거래하는 그런 물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쯤은 금세 알 수 있다.

시장에 얼마나 많은 물건이 쌓여있는가? 없는 게 없다고 할 정도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갖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갖고 싶은 것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구매 능력이 없다면, 곧 돈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득 쌓여 있는 그 많은 갖고 싶은 것들은 한 마디로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구매 능력이 전혀 없으면 어떻게 할까? 아무것도 살 수 없다. 그러면 굶어야 하나? 그러면 길에서 자야 하나? 그러면 옷도 입지 않고 살아야 하나? 그러면 아파도 그냥 참아야 하나? 그러면 아무 곳에도 가지 말아야 하나? 그러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야 하나? 강도를 만나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나? 어떤 분은 그래도 된다고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고 그 상품의 구매 능력 유무로 사람의 삶이 정해진다면, 그런 사회는 사람 사는 사회일까?

아무리 무자비한 자본주의 사회라도 그런 적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절없이 삶을 버릴 정도로 사람이 초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할 텐데, 단지 구매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삶을 포기하라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설득하더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강탈’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살고 봐야 하니까.

▲ 지난 23일 밤, ‘나와 내 이웃의 안녕을 묻는 시국미사, 모두들 안녕하십니까’에 참석한 뒤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앞을 행진하는 사람들 위로 철도노조 파업 지지와 민영화 반대를 촉구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문양효숙 기자

경제학 혹은 정치학에서 ‘공공재(public goods)’란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재화 또는 서비스를 말한다. 공공재는 ‘비배제성’을 갖는다고 한다. 비배제성이란 시장의 가격원리가 적용될 수 없으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그 재화나 서비스가 공급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재화이므로 아무도 그 재화나 서비스 공급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공공재는 ‘비경쟁성’이란 특징도 갖는다. 누가 그 재화를 사용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은 사용 못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장 많은 예를 드는 재화가 ‘등대’다. 등대의 불빛을 내 배가 보았다고 해서 다른 배가 그 등대의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대체품이 없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물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당연히 없다. 공공재는 흔히 국방, 치안, 소방, 공원, 도로, 교육, 의료 등과 같은 재화 또는 서비스를 말한다.

문제는 무엇을 공공재로 삼을 것인가이다. 국방을 공공재로 보지만, ‘사병’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경찰을 공공재로 보지만, ‘사설경비’를 구매하는 사람도 있다. 도로를 공공재로 보지만, ‘민자도로’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다. 그러니까 공공재는 하늘에서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정하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그 때문에 공공재에 관하여 이른바 ‘정치적 과정(political process)’, 곧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실 우리의 경우 그동안 상당한 분야에서 ‘공공’의 성격을 갖는 재화를 구축해왔다. 의료 분야를 예로 들어보자.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의료서비스 구매 능력이 없다 해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 분야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공교육이라는 것을 통해서 교육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정부가 건설한 도로나 철도의 경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수도, 전기 등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에 공통점이 있다. 시민들이 그 공공 성격의 재화 마련에 재정적 부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재화 및 서비스를 이용할 때 구매 능력에 크게 좌우되지 않도록 한다는 특징도 갖는다. 그 때문에 보통 공공재는 모두가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정부의 재정으로 공급하며, 소비자가 그 재화 및 서비스 이용에 지불할 ‘가격’에도 개입한다. 적자가 나더라도 함부로 요금을 올리지 않고, 오히려 정부의 재정으로 그 적자를 감당한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공공재는 사람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성격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돈벌이 측면에서 보면 대단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재화나 서비스를 누구나 반드시 구입해야 할 상품이라면 그보다 더한 사업이 어디 있겠는가? 수돗물을 사유화하면, 곧 민영화하면 어떻게 할까? 물 없이 살 수 있을까? 물 없이 농업을 할 수 있을까? 수돗물 공급사업자가 가격을 정할 때, 그 가격이 비싸다고 대체할 그 무엇이 없다면 물 소비자는 어떻게 할까?

의료서비스사업을 민영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한다면? 혹은 의료사업 투자자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영자가 진료비를 책정한다면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할 환자와 가족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다른 병원을 찾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공급 쪽에서 가격을 담합하면 어떻게 될까? 아픈 사람이 비용을 더 부담하든가 의료서비스의 양과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의료서비스 구매 능력이 있는 분들에게는 양질의 충분한 서비스를 구매하여 건강을 되찾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기업 입장에서는 공공재가 너무나 아까운 ‘황금시장’이지만, 그 소비자들에게는 그만큼 치명적일 수 있다. 소비자들 가운데 구매 능력이 충분한 이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지 몰라도, 구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삶, 곧 사회적 약자의 삶은 이 겨울의 추위보다 더 추운 동토로 내몰릴 가능성이 너무 높다. 최근 철도 사업과 관련하여 정부가 절대로 ‘민영화’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도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라도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난 몇 년 전부터 우리의 경우 그렇지 않아서 큰 탈이다. 우선, 마치 효율성과 경제성이면 무엇이든지 시장에 내다 팔아도 된다는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세뇌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효율성과 경제성을 내걸며 모든 것을 다 민영화할 기세에도 덤덤하다.

둘째, 시민들의 조세 부담 의지는 너무 낮다. 감세가 대세다. 물론 모든 계층의 감세는 아니지만 말이다.

셋째,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과정’을 이루어낼 ‘정치세력’(여당이든 야당이든)이 없다. 정치세력은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증진시키기보다는 ‘폐쇄적 지배집단’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를 부정하려는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시민이면서 시민사회를 구성하지 않으려 한다. 정치와 경제(시장), 그리고 사회는 상호 견제함으로써 균형을 이루어야 함에도, 우리의 경우 정치는 실종되고, 시민사회는 부정되며, 경제만 남은, 그것도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비윤리적 경제만 욱일승천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두려운 마음으로 읽는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우리 사회는 라자로와 같은 처지의 이웃조차도 라자로와 연대하지 못하는 세상, 그럴 힘마저 빼앗는 세상, 그래서 개들까지 먹을 것이 없게 되어 배가 텅 빈 라자로의 종기라도 핥아야만 하는 그런 세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다. 물론 ‘대문’ 넘어 ‘하느님 보시기 좋은 세상’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이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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