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15]

라벨의 <볼레로>는 비교적 단순한 리듬 주제를 사용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는 곡으로, 형식의 단순성에 비추어 볼 때 짧지 않은 길이인 340마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인간의 음악 능력은 어떤 생물학적 유용함이 있어서 진화한 것일까’를 다룬 레비틴의 책 <뇌의 왈츠>를 읽다가, 라벨이 <볼레로>를 작곡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작곡가 라벨은 좌뇌의 대뇌피질에 일부 손상을 입어 음높이 감각을 부분적으로 잃었지만, 음색의 감각은 그대로여서, 결국 음색의 변화에 중점을 둔 작품 <볼레로>를 작곡하게 되었다.” 하지만 책의 다른 곳에서 “<볼레로>는 시간과 선율 공간의 절묘한 조합을 보여주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또 다른 책(음악지우사 편, <라벨>)을 읽다가 이 곡을 간단히 도식화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코다 부분에서 변화를 준 두 마디를 제외하고, 338마디를 도식화한 것이지요. 누구든지 이 도식을 보면 곡 전체의 구조가 머릿속에 쉽게 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R+[(R+A)☓2+(R+B)☓2]☓4+(R+A)+(R+b1). (* 여기서 R은 리듬 주제)

작은 북이 리듬 주제를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볼레로>는 스페인식 아랍 양식의 민요 가락을 모티프로 하고 있습니다. 플루트가 작은 북의 리듬에 가세하고 곧 이어 클라리넷, 하프가 가세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곳,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색소폰, 오보에, 잉글리시 호른 등이 차례로 등장하며 두 번씩 되풀이되는 리듬 주제를 계속 반복해갑니다.

이처럼 라벨은 다른 곡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기법을 사용해서 이 곡을 작곡했는데, 동일한 리듬 주제를 사용해서 전체 340마디 중에 169회를 반복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 감정을 고조시키는 느낌을 주도록 악보 전체에 걸쳐 크레셴도(점점 세게)라는 악상기호를 적절히 사용했습니다.

이 곡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악기가 하나씩 추가되면서 같은 리듬을 반복해나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고 듣는 것도 좋지만, 이 곡을 주제 음악으로 해서 무대에 올린 발레를 보는 것도 이채롭고 볼거리가 많습니다. 이 곡을 발레 작품으로 만들 때 어떻게 재구성하고 연출했는가에 따라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발레가 관객에게 주는 감동도 유별나고 색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리스 베자르가 안무를 하고 주르쥬 돈이 열연한 라벨의 <볼레로>를 동영상으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막이 오르면 작은 북이 리듬 주제를 조그맣게 연주하기 시작하고, 캄캄한 무대 위에는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손이 리듬에 맞추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플루트와 클라리넷 소리가 가세하면서 춤을 추는 발레리노의 얼굴과 상체, 다리 등 신체 일부분을 조명이 비추다가, 마침내 검은색 타이츠를 입고 상체는 벗은 채 맨발로 원탁 테이블 위에서 홀로 춤추는 발레리노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라벨의 <볼레로>를 주제 음악으로 한 발레 공연의 한 장면 (Classical Music Orchestra Dance Paris 2012에서)

발레리노가 추는 춤은 초반을 지나 중반에 이르도록, 전혀 흐트러짐이 없이 초반의 리듬감을 그대로 유지하며 원탁 테이블 위에서 계속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탁 테이블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며, 무대 위 바닥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원탁 테이블 위의 춤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발레리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춤이 시작된 지 수 분이 지나면서, 흥겨운 리듬과 춤에 고무된 발레리노 두 명이 의자에서 일어나 원탁 아래에서 리듬에 맞추어 같이 춤을 추기 시작하고, 잠시 후 두 명이 더 가세하는 등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원탁 위의 발레리노는 고조된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며 율동적인 춤을 멈추지 않습니다.

마침내 원탁 아래서 구경만 하고 있던 나머지 발레리노들도 참을 수 없는 듯 모두들 의자에서 일어나 한데 어울려 흥겹게 춤을 춥니다. 클라이맥스, 그리고 종지(終止).

이처럼 동영상을 보면서 생각해보니, 모르긴 몰라도 이 곡을 주제로 하여 무대에 올린 발레 작품의 수 또한 발레단의 수만큼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볼레로>는 루빈스타인이 라벨에게 작곡을 의뢰한 후, 수많은 안무가들에 의해 작품화되었는데, 니진스키, 세르쥬 리빠, 아르헨티니타, 모리스 베자르, 라브로프스키 등 세계적인 안무가들에 의해 재탄생되곤 했습니다.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고심하고 땀을 흘렸을 것을 생각하니, 무대 위의 어느 것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순한 형식의 곡 하나가 발레라는 다른 형식의 예술과 만나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발레라는 예술세계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주고, 무대 위 그리고 무대 뒤에서 하나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땀 흘린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라벨의 <볼레로>는 단순성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곡이라고 할 것입니다.

‘2012년 교향악 축제’ 때 서울시향이 이 곡을 연주했었는데, 당시 동영상에 소개된 자막을 읽으면, 이 곡을 주제 음악으로 하여 발레를 연출했던 안무가의 의도와 이 곡에 대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작곡가 ‘라벨’이 1928년에 완성한 <볼레로>는 당시 발레리나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루빈슈타인으로부터 공연을 위한 음악을 의뢰 받아 작곡된 작품으로, 18세기에 생겨난 스페인 무곡의 한 형식인 <볼레로>라는 명칭을 그대로 차용한 작품이다. 단조로운 리듬의 반복과 함께 점증하는 크레셴도의 매력이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 이 작품은 술집의 탁자 위에서 무용수가 홀로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다가, 격하게 고조되는 리듬과 춤의 역동성에 동화되어 손님들도 다함께 춤을 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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