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김인국 신부]

▲ “안녕들 하십니까?” 하고 묻는 대학생의 대자보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교회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너무나 분명해졌다. 줏대 없이 흔들리거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세상과 안전 거리를 두어도 좋을 때는 벌써 지났다. 어쩌면 세계인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교황의 호소는 교회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는지도 모른다. ⓒ한상봉 기자

2013년이 저물고 있다. 가톨릭교회로서는 고맙고 행복한 한 해였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복음의 기쁨’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등장한 교황의 영감 덕분이다. 어떤 이는 춤추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린다.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에 세계가 주목하며 열광하고 있다.

그의 언어는 단순 소박하며 직설적이라서 알아듣기 쉽다. 자본주의를 ‘새로운 독재’라고 부르며 주저하지 말고 맞서라고 격려한다. 그의 통찰은 예리하고 요구는 과감하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난에 관한 화려한 수사는 차고 넘쳤지만 이렇게 마음을 울린 적이 또 있었나싶다. 도통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오늘의 현상을 일컬어 ‘무관심의 세계화’라고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인류 사회를 망치는 치명적인 병이라고 지목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교황은 곧바로 신앙인들의 적극적인 정치 개입을 촉구한다.

“그들이 통치하니,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통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동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2013. 9. 16, 성녀 마르타의 집 소성당 미사 강론)

허다한 사람들이 어부의 반지를 물려받았지만 어느 지점에 그물을 던져야 하는지 이토록 구체적으로 알려준 지도자는 일찍이 없었다. 세상과 거리를 둘수록 교회의 미덕이 빛난다고 믿었던 이들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교황의 말씀은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억지로 수긍해야 할 신사조가 아니라 복음의 오래된 요구이다.

교황이 자신의 첫 공식 문헌을 발표한다는 소식이 타전되면서 전세계는 또 다시 숨죽였다. 드디어 11월 26일 교황 프란치스코의 사상 기조가 담긴 교황 권고가 공개되자 사람들은 ‘5장 288조’에 어떤 가르침이 담겼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국 사회의 반응도 맹렬했다. 언론이 일제히 대서특필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개인들이 제각각 번역한 것을 가지고 서로 보여주며 놀라워하였다.

“밖으로 나갑시다. 밖으로 나가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모든 사람에게 나눠줍시다.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거나 틀어박히는 고립으로 병들어가는 교회보다 길 위에서 더러워지고 상처입고 멍드는 교회가 낫습니다. 강박과 절차에 얽힌 채로 그저 꼼짝도 못하는 교회는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응당 마음을 쏟아야 할 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형제들이 아무런 힘도, 빛도, 예수님과 나누는 우정의 위안도, 자신들을 받아주는 신앙 공동체도, 삶의 전망도 의미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기쁨> 49항)

하필 전세계에 권고문이 발표되던 그날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밖으로 나가자”는 교황의 호소에 엇박자를 냈다. “교리서는 사제가 직접 정치적이고 사회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것은) 사목자가 할 일이 아니다. ‘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도 정치나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교회적 친교의 분열을 야기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사제들이 깊이 숙고해야할 대목이다”(신앙의 해 폐막미사 강론)라고 했던 것이다.

전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 때문에 몹시 흥분해 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서울대교구장의 강론에 반색하였다. ‘사제의 정치참여, 교회 분열 야기’라는 큼지막한 제목을 달았다. 아무래도 머쓱했는지 닷새 후 대주교는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의 구조에 짓눌리지 말고 용감하게 개선하며 변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말자”는 교황의 말씀을 인용했지만 “그 방법은 철저하게 복음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한 처지에 몰려있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의 구조에 짓눌리지 말고 용감하게 개선하며 변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말자”는 교황의 말씀을 인용했지만 “그 방법은 철저하게 복음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상봉 기자

돌이켜보면 콘스탄티누스의 규범과 그리스도의 규범 사이에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흔들렸고 쓸데없이 서성거렸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겁박에 고분고분하였고 맥없이 물러나기 일쑤였다. 그런 세월이 켜켜이 쌓이면서 복음이 주창했던 ‘새 길’은 까먹고, 콘스탄티누스를 찬양해마지않던 주교 에우세비우스의 생각을 교회의 본분으로 여기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회 밖의 주교’로 군림한 콘스탄티누스 치세를 로마 제국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여겼던 것은 우리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 까닭은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믿었던 것을 그리스도교라고 불렀기 때문이다”(알리스테어 키).

“안녕들 하십니까?” 하고 묻는 대학생의 대자보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교회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너무나 분명해졌다. 줏대 없이 흔들리거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세상과 안전 거리를 두어도 좋을 때는 벌써 지났다. 어쩌면 세계인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교황의 호소는 교회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툭하면 종교의 사회참여를 부적절한 정치개입으로 몰고 가는 수구기득권언론에 대한 입장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그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는 사제들의 양심선언을 잠재우려고 사나운 비난과 모독의 포화를 퍼부었다. 교회를 이른바 ‘반사회적 종북세력’으로 몰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교회가 가타부타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반대 받는 표적이 되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말이 아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사제의 강론과 기도를 정치개입으로 규정하는 수구언론의 생떼쓰기만이라도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째서 주교단의 낙태 반대와 사형제 폐지 주장은 ‘선교활동’이고, 사제단의 정리해고 반대와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은 ‘정치활동’이 되는지 설명해야 한다.

12월 13일자 <동아일보>는 교황이 언급한 ‘복음화의 사회적 책임’의 참뜻은 무엇이겠냐고 물었다. 해당 기사는 서울대교구장,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최근 발언을 나열하고는 “각자의 성향이나 편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며 이를 “혼란”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교황 권고의 해석과 실천은 전적으로 각 교구장의 역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물론 권고문 <복음의 기쁨>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작문이지만 자주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입장을 흐려버리는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2010년 3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주교회의의 성명을 두고도 추기경과 일부 주교들은 찬성도 반대도 아니라면서 혼선을 불러일으켰다. 골병든 세상을 돌보고 교회를 회생시키려는 교황의 애끓는 호소마저 그런 운명을 겪지나 않을지 염려스럽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아울러 현세 질서를 개선하는 것은 평신도의 고유 임무이니 사제나 수도자들은 현실과 거리를 두는 게 마땅하다고 암시하는 논리도 더 이상 회자되지 않기를 바란다. 교회법과 교리서의 생각과도 맞지 않을 뿐더러 그것은 무거운 짐을 양떼의 어깨에 얹고 자기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으려는 야박한 처사에 다름 아니다.

아직도 그런 입장이라면 2000년 주교회의가 “정교분리를 이유로”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민족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고, “분단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또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인권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함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교회가 자신의 “무관심과 방관 그리고 잘못으로 상처받은 분들에게 용서를 청”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2000. 12. 3,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쇄신과 화해> 참조).

“인간의 가치와 존엄에 대한 경탄,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면, 그리고 “새로운 복음선교란 가난한 자를 편드는 정의구현”(교황 프란치스코)이라는 정의에 동의한다면 ‘문턱을 넘어서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높은 창에서 밖을 내려다보며 망설이는 사목자들을 향해 교황은 단호하게 말한다.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찾고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의 사명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 자신이 손실을 입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 업무를 교구 일로 제한하고 공동체 안에 틀어박혀 살 때, 독방에 감금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들이 교회에도 일어납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위축되는 것입니다. 마치 습기가 차서 곰팡이가 번진 아파트 벽처럼 말입니다.” (사베리오 가에타, <교황 프란치스코―새 시대의 응답자>, 성바오로출판사, 62쪽)

성인은 만사에 어미가 어린 자식을 대하듯 하므로 반드시 행할 길을 발견하게 된다. 반드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을 찾아내면 사물을 보는 총명을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일을 행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는다. 주저하지 않고 행함을 일러 용기라고 한다. 망설이지 않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노자는 사랑하기에 용감해질 수 있다고 했다(韓非子-解老 27). 여기서 나온 말이 자고능용(慈故能勇)이다. 자비와 용기는 교회 고유의 덕목이다.


김인국 신부
(마르코)
청주교구, 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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