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29

1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여러분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 막아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합니다.”(마태오 23,1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는 마태오에게 예수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표다.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교 회당에서 쫓겨난 후 유다교의 주축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에게 그 책임을 예수가 추궁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가 유다교 개혁에 나선 것은 아니고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교와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가 진짜로 한 말씀은 아니고 초대교회에서 덧붙인 구절이다. 예수가 생전에 바리사이들과 논쟁하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 사후 50여년 후에 마태오 공동체와 바리사이가 격돌하는 장면이다. 공동체가 닥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마치 예수가 진짜 한 말처럼 초대교회가 꾸며낸 구절이 성서 곳곳에 있다. 이런 사실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잘 교육받고 있을까. 만일 신자들이 그런 내용을 잘 모른다면 누구 탓이고 누구 책임인가.

마태오 23,13-33에 나오는 7가지 저주는 마태오 5,3-10에 나오는 8가지 행복선언과 짝을 이룬다. 행복선언이 빛이라면 저주선언은 어둠이다. 두 단락을 연결해서 보아야 서로를 각각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인 13절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마태오 5,3)를 의식하고 있다. 하늘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인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늘나라로 초대했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것이다. 유다교에 대한 마태오의 적개심이 담긴 구절을 해설하자니 참 딱하고 안타깝다. 유다교 형제자매들이 읽으면 몹시 불쾌할 단락이다.

히포크라테스(hypocrites)는 그리스어로 ‘연극배우’를 뜻한다. 70인역 공동성서에서 위선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 등으로 이해되는 부정적인 단어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 존재와 실천 사이의 모순을 가리키는 폭넓은 뜻을 가진 단어다. 행동과 생각이 다르고(마태오 6,2-18),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사람들을 비판하고(마태오 7,5), 인간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을 구분하지 않고(마태오 15,7), 거짓 칭찬과 불순한 질문을 하는(마태오 22,18) 모순의 사례가 마태오에서 소개된다.

마태오 6,2-18은 마음속에 담겨진 위선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비롯한 마태오 23장 전체는 위선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행동을 비판하고 있다. 마태오는 가르침을 중시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행동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마태오 7,21-23; 12,49-; 25, 31-46) ‘행동하는 예수’가 마태오복음의 핵심이다. 행동하는 예수와 정반대 쪽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가 있다고 마태오는 지적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행동하는 예수를 본받으라는 가르침이다. 유다교에는 경고를, 마태오 공동체에는 행동하는 예수를 본받으라고 교육하는 것이다.

바리사이파는 어쩌다가 위선자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사람 중에도 바리사이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유다교 내부에서도 바리사이파를 위선자로 스스로 비판하였다.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거짓으로 가르친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문헌이 쿰란 공동체에도 있다. 바리사이파에 대한 예수의 비판을(마태오6,2-18; 23,23-) 마태오는 넘겨받았다. 마태오 자신도 바리사이파를 비판하고 있다.(마태오 7,6; 12,15) 마태오 공동체의 선교사들이 유다교 사람들과 갈등하던 경험도 마태오는 잊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위선자로 동일시하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부당하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바리사이파를 위선자로 공격하는 나쁜 전통이 불행하게도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었다. 교회사에서 부끄러운 사례를 들추는 것이 못마땅한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스도교는 정직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자기 역사를 정직하게 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무엇을 가르칠까.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나무라기 전에 자신의 역사를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율법을 증거하는 예수를 믿지 않는 바리사이는 율법을 모른다.(히라리우스, Hilarius)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나 바리사이다.(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단테(Dante)는 교황 보니파시오(Bonifaz) 8세를, 루터(Luther)는 가톨릭 신도를 바리사이라고 비판하였다. 희생양을 찾고 만들어서 바리사이로 낙인을 찍는 일은 교회 안팎에서 지금도 날뛰고 있다. 정치에서 심지어 그리스도교 설교에서 여전히 유행하는 그런 모습은 어서 사라져야 한다.

13절의 하늘나라를 교회와 동일시하는 설교자들이 없지 않다. 그렇지 않다. 초대교회에 들어오려는 유다인들을 바리사이들이 방해한 것으로 해설하는 사람도 있다. 잘못된 해설이다. 마태오 16,19에서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는 제자로 나타난다. 베드로와 정반대 사례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가 오늘 단락에서 소개되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사람들아’라는 구절을 성직자 또는 나 자신을 대입해서 읽어보자.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는가.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은 얼마나 많은 신자들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는가. 자기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남들은 들어가도록 협조해야 하지 않는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 앞에서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은 디딤돌인가 장애물인가. 디딤돌인 성직자도 있고 장애물인 성직자도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집에 거울은 있겠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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