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28

“8 그러나 여러분은 스승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스승은 한분 뿐이시고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 9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시오. 여러분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10 또 여러분은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마시오. 여러분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11 여러분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집니다.”(마태오 23,1-12)

베드로를 비롯한 1세대 제자 이후 2세대 제자들 때부터 초대교회가 조직화 되고 계급화 되기 시작하였다. 오늘 본문은 2세대에 속하는 마태오가 동료인 2세대 제자들에게 하는 경고다. 예수가 처형되기 며칠 전에 하는 유언이니 예사롭게 들을 말이 아니다. 스승, 아버지, 지도자, 이런 세 가지 호칭을 제자들은 듣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런 호칭을 듣지 말라는 것은 그런 호칭을 아예 쓰지도 말라는 경고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이상하다. 그런 단어가 가장 자주 들리는 곳이 바로 그리스도교 아닌가.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유언을 망각했는가.

8절과 10절은 마태오 공동체에 분명히 존재하던 그리스도교 율법학자를 겨냥하고 있다.(마태오 13,32; 23,34) 마태오가 유다교 율법학자들에게 비판하던 모습이 정작 마태오 공동체에서도 보였던 것이다. 2세대 제자 시기부터 직분의 차이에 따른 계급의식이 공동체 안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모습에 대한 염려가 야고보서에도 보인다.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야고보 3,1-2)

앞 단락에서 마태오가 유다교 율법학자들을 비판할 때 쓴 호칭 랍비(Rabbi,스승)는 마태오 공동체에서도 통용된 듯하다. 마태오는 명예와 권력에 대한 그리스도교 율법학자들의 욕심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종교인들의 욕심은 이미 초대교회에도 보였다. 명예와 권력에 대한 종교인의 욕심은 대체 왜 존재할까.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종교인의 욕심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스승은 오직 한분 뿐’이라는 말이 8절과 10절에서 반복되었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스승이시기에 그렇다는 뜻이다. 스승이라는 호칭을 금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께 집중하라는 권고가 담긴 말씀이다. 하느님께 집중하라! 칼 바르트(Karl Barth)가 처음 한 말이 아니라 이미 마태오가 강조하는 말이다. 종교인은 하느님 자리를 넘보거나 침범하면 안 된다. 하느님을 마치 자기 비서 부리듯 경거망동하는 종교인이 드물지 않다. 훌륭한 조상이나 뛰어난 학자에게 유다교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말해지지만 아직 그런 문헌은 발견되지 못했다. 로핑크(G. Lohfink)의 제안처럼, 아버지라는 호칭을 금지한 것이 가부장적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까. 카테게데스(Kathegetes)는 지도자, 안내자뿐 아니라 교수를 가리키는 넓은 뜻을 가졌다. 비잔틴 시대에는 세속적인 선생을 가리키던 필로소포스(philosopos)와 다르게 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를 뜻했다. 플루타크(Plutarch)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를 카테게데스(Kathegetes)라고 불렀다.

여러분은 모두 형제들(adelpoi)이라는 8절 말씀은 두 가지를 뜻한다. 1.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평등하다. 2.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단합하라. 11절 섬기는 사람이 으뜸이라는 말씀은 예수의 새롭고 놀라운 사상이다. 유다교 랍비들에게 그런 요구를 있었다는 문헌은 찾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교만한 사람을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는 사상은 공동성서에서 자주 나타났다.(욥기 22,29; 이사야 3,17; 10,33) 12절은 그리스도교 안에 모든 권력에 대한 욕망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이다. 그냥 말로만 되새기지 말고 교회구조에 대한 심각한 반성으로 이어져야 할 구절이다.

오늘 본문은 특히 가톨릭 교회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개신교 교회론도 예외는 아니다. 가톨릭 교회론은 마태오복음에서 베드로에 대한 구절을 인용하여 교황직과 연결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가 바라는 교회 모습와 가톨릭교회의 현실은 서로 거리가 멀 뿐더러 그 방향이 반대다. 가톨릭 교회법은 모든 신자의 평등 정신이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않다. 고대 왕조정치 체제를 본뜬 가톨릭 교회구조는 예수 말씀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구조를 계급적으로 만들어 놓고서 성직자 개인의 겸손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가톨릭교회는 겸손한 독재자를 모범으로 삼는다는 말인가. 예수와 마태오가 슬픈 일이다. 직분을 유지하면서도 계급구조와 계급의식을 없애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서가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모두 형제들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불렀다.(마태오 12,48-50) 고통 받는 사람들을 예수는 형제라고 불렀다.(마태오 25,40) 예수는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생각도 삶도 그랬다. 인간 평등, 자유와 해방, 이 얼마나 놀랍고도 고마운 예수의 사상인가. 그러나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주교나 목사나 신부는 많은가. 성직자는 1등급 신자이고 평신도는 2등급 신자인가. 성직자는 교회 주인이고 신자는 객인가. 특히 성직자들에게 평등사상이 부족하다.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시오”라고 예수는 경고했지만 신부(神父)라는 경망스런 호칭은 가톨릭에서 상식이 되었다. 신부(神父)는 오늘 본문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호칭이다. 그것도 모자라 몬시뇰, 추기경이라는 호칭을 만들고도 부끄러움이 없다. ‘누가 한국 천주교의 수장(首長)‘이니 하는 언론 보도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신자들은 별로 없다.

‘나를 주교라 부르지 말고 형제라 불러 달라.’, ‘나를 신부라 부르지 말고 형제라고 불러 달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어서 나오길 빈다. 직분은 사제이지만 호칭은 형제로 하는 것이 성서정신에 더 적합하다. 누가 그렇게 요구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말씀을 깊이 깨달아서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평신도들이 주교나 신부나 목사를 ‘아무개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날이 한국에 어서 오길 바란다. 그런 시간을 종교인 자신들이 앞장서서 앞당기기 바란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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