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은 권리를 박탈당한 힘없는 이들의 몫"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실상 첫 번째 권고문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이 지난 11월 26일 발표되면서, 그동안 교황의 혁신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었던 이들이 일제히 “교황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분명한 교회개혁 의지를 보였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강력히 비판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하느님은 모든 형태의 노예적 삶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신다”며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 평화를 촉진하는 것이야말로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한 구성적 요소”라고 강조했다. 또한 배제와 불평등의 사회를 비판하며 “오늘날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으며,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금융자본주의를 “새로운 우상”이라고 지목하며, 국가도 통제할 수 없는 경제권력은 “새로운 독재”라면서, 자유시장이 통제할 수 없는 하느님을 “위험한 존재”로 여기는 체제를 비판했다.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지금보다 더 선교적이 되고, 좀 더 자비로우며, 변화 앞에 담대해져야 한다”면서 “교회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관습과, 관행과, 스케줄과, 용어들과 구조 등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를 꿈꾼다”고 말했다. 이어 특별히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평화를 위해 특별한 열정을 지녀야 한다”고 촉구했다.

교황은 “문 밖에서 백성들이 굶주릴 때, 예수께선 끊임없이 ‘어서 저들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라’고 가르치셨다”면서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고 말했다.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자들이 줄곧 말해왔던 것처럼 “부자와 자본가들에게 저당 잡힌 교회를 다시 가난한 이들에게 돌려주려는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는 이제 야전병원처럼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세상의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고,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 연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교회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가난해질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전갈이다.

 ⓒ한상봉 기자

소비 자본주의에서 그동안 혜택을 누려왔던 이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교황의 발언이 ‘혁명적’일 것이다. 그러니 화들짝 놀라서 ‘교황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의 방송진행자 러시 림바우는 “교황의 주장은 완전한 공산주의”라고 비판했다. 프란치스코가 ‘붉은 교황’이라는 것이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2월 14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일간지 <라 스탬파>와 가진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난 내 인생에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그 만남이 불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복음의 기쁨>에서 전한 내용은 대부분 사회교리에서 역대교황들이 다룬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비슷한 예를 ‘가톨릭일꾼운동’(CatholicWorker)을 창립한 ‘주님의 종’ 도로시 데이(Dorothy Day)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로시 데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빌려간 것”이라면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열정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고백하였다. 베트남전쟁 당시 전쟁옹호론자들이 반전운동을 벌이던 도로시 데이에게 ‘모스크바 메리!’라고 야유했지만, 도로시 데이야 말로 사회교리를 자기 활동의 준칙으로 삼은 여성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 교황은 어떠한가? 교황이 되기 전 이탈리아 베르가모 교구에서 테데스키 주교의 비서로 사제생활을 시작한 안젤로 론칼리(요한 23세) 신부는 라니카 제련소 노동자들이 파업했을 때, 교구장과 함께 노동자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교구 신문을 통해 파업기금을 모아주었다. 그러자 우익성향의 <페르세베란차> 신문은 “주교의 자선금은 파업에 대한 축성이며 공공연한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강복”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론칼리 신부는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노동헌장>에서 노조활동을 옹호하고 있다면서 “교회가 정치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교회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답했다. 즉,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은 ‘권리를 박탈당한 힘없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와 제한 없는 자본주의를 모두 비판해 왔다. 권력과 탐욕이라는 우상을 모두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노동자들의 참상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100년 넘게 주로 사회주의운동을 경계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게 곧 자본주의에 대한 승인이 아님은 분명하다. 1991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발표한 <백주년>에서는 “공산주의 몰락 후 자본주의가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사회체제인가?” 묻는다. 자본주의가 만일 확실한 정치구조 안에서 제한되지 않는다면 그 대답은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회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를 ‘새로운 독재’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마르크스주의의 해결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주변화와 착취의 현실, 그리고 인간 소외의 현실들은 세계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염려했다. 이어 자본주의가 이런 문제들을 취급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면서, “모두 시장의 힘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경솔하게 믿는, 자본주의에 일치하는 근본적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경고한 바 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 나라라는 종말론적 전망 안에서 우리 시대를 읽으려 하기 때문에, 기존 체제 어느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백성인 인류가 두루 영적 구원과 사회적 해방을 경험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교리가 줄곧 천명해 온 것은 다름 아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다. 이들이 기뻐할만한 복음이 먼저 실현되어야 만인에게도 온전한 복음을 전달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는 교회를 갈망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언하고 있듯이,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새로운 경로를 더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오해와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울 것이 없노라”라는 시편 구절을 읽을 뿐이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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