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14]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북유럽 특유의 감상적이며 우울하고 장중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지곤 합니다.

1839년 바그너가 빚 때문에 채권자들을 피해 그의 아내와 함께 외국으로 항해하는 도중에 영감을 얻어, 2년 후 완성한 가극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었는데, 항해하는 내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라는 유령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선원들의 노래>라는 선율도 그때 떠올랐다고 합니다.

당시 바그너가 스물여섯 살 때라고 하지만, 그의 운명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처럼 길고 긴 방황을 하게 될 것임을 그의 마음속에 떠올랐던 선율이 암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자꾸 끌리는 음악이 있을 때, 그의 운명도 음악의 가사나 선율처럼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바그너는 어려서부터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케스트라가 음을 조율하는 소리나 오보에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 환청을 듣기도 했고, 눈물과 땀에 젖은 채 꿈에서 깬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무언가에 열중하다 보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내면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음악을 자꾸 듣게 되는 것이지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그의 음악을 왜 좋아했을까 궁금한 생각이 자꾸 들어서입니다.

바그너는 파리 근교의 단칸 셋방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완성하였는데, 대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썼습니다. 문학과 음악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오페라(문학성=음악성)라고 바그너가 주장하곤 했는데, 이탈리아 오페라(문학성<음악성)나 프랑스 오페라(문학성>음악성)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대본을 쓰는 사람과 작곡을 하는 사람이 나누어져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모르나 바그너는 자신이 직접 대본과 곡을 썼습니다. 어떻든 바그너가 문학에 대한 소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긴 하지만, 그의 확고한 철학과 초인적인 노력이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바그너가 쓴 가극들의 소재는 주로 게르만 민족과 관련이 있는 북유럽의 신화나 기독교의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규모 면에서 보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작들이었습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그러했고, ⟨탄호이저⟩나, ⟨로엔그린⟩, ⟨니벨룽의 반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파르지팔⟩ 등이 그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악극 ⟨니벨룽의 반지⟩ 같은 경우는 완성하기까지 28년이나 걸린 초대작이었습니다.

바그너가 살았던 삶의 자취를 보면, 그의 악극만큼이나 파란만장했습니다. 이십 대 중반에 빚을 많이 지고서 채권단의 눈을 피해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외국으로 도주하기도 했으며, 혁명군에 가담하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으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명 수배를 피해 스위스로 도피하여 오래 머물다가, 겨우 고국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바그너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큰 도움을 주고 거처까지 마련해 준 상인의 아내 마틸데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리스트의 딸이자 유부녀인 코지마와 불륜에 빠져 딸을 낳는 등 리스트와 갈등을 빚다가, 코지마가 이혼한 뒤 그녀와 재혼하기도 했습니다.

바그너가 죽고 나서 6년 후 태어난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탓에, 히틀러 집권 당시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곡이 많이 연주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이 좋아하는 ⟨탄호이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틀도록 했기 때문에,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에서는 ⟨탄호이저⟩의 공연이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나치 정권 하에서 많은 고초를 겪다가, 미국으로 이주해서 22년 동안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던 게오르크 솔티가, 빈 필하모닉과 빈 국립오페라합창단을 지휘하여 ‘데카’레이블에서 내어놓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는 20세기 초반부터 지금까지 팔려나간 음반 가운데 역대 최고의 판매고를 올렸는데, 지금까지 1,800만 장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바그너에 대해선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으나, 바그너의 악극을 공연하기 위해 만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극장에서 매년 바그너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고, 그 축제를 보기 위한 입장권이 짧게는 1~2년 전에, 길게는 8년 전에 이미 예매가 끝날 정도로, 그의 음악이 수많은 바그네리안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음악에 대한 바그너의 열정과 고군분투는 헛되지 않았던 셈입니다.

바그너 이전의 오페라들이 레치타티보와 아리아, 듀엣, 합창이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각 곡에 일련번호를 붙였다고 하면, 바그너는 악극의 악절 구분을 최소화하고 선율을 계속 이어지게 함으로써, 음악의 지속성과 통일성을 확보하는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 ‘음악극’을 만들었습니다. 즉 동일한 음악적 주제를 반복하는 유도동기를 사용해서 극적인 흐름과 극 전체의 통일성을 추구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작곡기법을 더욱 발전시킨 음악가가 드뷔시였으며, 알반베르크는 과거의 오페라 양식과 유도동기 양식을 통합하여 ‘문학 오페라’라고 하는 새로운 오페라 양식을 만들어냈습니다. 한때 오페라의 종말을 예언했던 음악가들도 있었으나, 오페라가 시대 흐름에 따라 이처럼 다양성을 더해가기도 하는 것을 보면, 오페라는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계속해서 들려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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