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21]

관중은 공자와 같은 춘추시대의 사람이지만 동시대인은 아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고 관중은 대략 기원전 715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공자에게 있어서도 관중은 이미 역사 속의 인물이었다. 춘추시대가 낳은 역사적 인물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단연 공자이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관중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왕도 제후도 아닌 일개 대부(大夫)로서 한 시대의 인물로 부각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관중은 제(齊)나라의 임금 환공(桓公)을 보필하여 이른바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로 등극케 한 사람이다. 환공이 포숙의 추천을 받아 그를 신하로 받아들인 이후 둘은 40년의 세월에 걸쳐 고락을 함께 하였다. 연(燕)나라가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제나라는 제후국들을 규합하여 오랑캐를 물리쳤고 주왕실이 오랑캐들에게 시달릴 때는 관중이 직접 나서 오랑캐들과의 화해를 이루기도 했다. 또 남방의 대국으로 주나라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있던 초나라에 원정하여 초나라로 하여금 주왕실에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환공에 대해 소위 구합제후, 일광천하(九合諸侯, 一匡天下), 즉 “아홉 번 제후들을 규합하고 크게 한번 천하를 바로잡았다”는 명예로운 평가가 따라다니게 된 것은 모두 관중의 보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관중에 대해 공자가 내린 평가로서 논어에 나오는 첫 단편은 제3팔일편 22장이다. 그 내용은 매우 뜻밖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중(管仲)은 그릇이 작았다.”
누군가가 말하였다.
“관중은 검소하였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씨는 세 곳에 집을 두고 있었고 가신들을 겸직시키지 않았으니 어떻게 검소할 수 있었겠느냐?”
“그러면 관중은 예를 알고 있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라 임금이 차폐문(遮蔽門)을 하면 관씨도 역시 차폐문을 하고 나라 임금이 양 군주간의 우호를 위해 잔대(盞臺)를 두면 관씨도 역시 잔대를 두었으니 관씨를 두고 예를 안다 하면 누군들 예를 모르겠느냐.”

한마디로 관중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그릇도 작고 검소하지도 않았으며 예의도 몰랐다’는 것이다. 춘추시대 최대의 걸물에 대한 평가로서는 심한 혹평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제14 헌문편에 가면 관중과 관련된 3개의 단편이 더 출현하는데 거기에서의 평가는 앞에서와는 달리 매우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혹자가 관중(管仲)에 대해 묻자 말씀하셨다.
“인물이다. 백씨(伯氏)로부터 병읍(騈邑) 삼백호를 빼앗았지만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다.”(14/10)

자로(子路)가 말했다.
“환공(桓公)이 공자(公子) 규(糾)를 죽였을 때 소홀(召忽)은 죽었으나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습니다.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아홉 번이나 제후들을 규합하면서 군사력으로써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그만하면 어질지 않으냐? 그만하면 어질지 않으냐?”(14/17)

자공(子貢)이 말했다.
“관중(管仲)은 어진 자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환공(桓公)이 공자 규(糾)를 죽였을 때 능히 죽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도왔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되게 함으로써 크게 한 번 천하를 바로잡으니 백성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다. 만약 관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오랑캐들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몄을 것이다. 어떻게 이름 없는 남녀들의 생각하여줌과 같겠느냐? 스스로 개천에 목을 매어 죽는다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14/18)

▲ 관중과 박정희
모두 4개 밖에 안 되는 관중 관련 단편 중에서 한 개는 그를 그릇이 작고 검소하지도 않고 예를 알지도 못 했다고 평가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세 단편은 모두 그를 긍정적인 역할을 통해 역사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논어>를 읽는 사람은 이 서로 다른 두 평가 사이에서 곤혹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떻게 된 것일까? 기록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공자가 일관성이 없었던 것일까?

4개의 단편을 오래 들여다본 후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네 단편은 모두 공자의 진심이 깃든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자의 판단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다만 관중의 그릇이 작고 검소하지도 예의를 잘 지키지도 않았다는 판단은 공자가 제시하는 인간상에 견준 관중의 솔직한 면모였다. 실제 사마천의 <사기> 관안열전(管晏列傳)도 관중은 자신의 주변을 권력자의 위세에 상응하는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치장하였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사마천은 그것을 시인하면서도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사치라고 비난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 점을 나쁘게 평가하지 않은 것이 공자와 다른 점이었다. 어쩌면 공자는 관중이라는 전설적 인물의 행적을 제자들이 무분별하게 추종할 때 사치와 무례까지도 선망하게 될 것을 경계하였는지도 모른다. 또 공자가 보는 한 관중의 사람됨에는 어떤 측면에 걸쳐서든 그 그릇의 작음이 실제 엿보였을 것이다. 그것을 공자는 그의 전설적 명성에 주눅 들거나 구애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진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헌문편의 세 개 기록은 좀 다르다. 그것은 관중의 구체적 사람됨과 일정하게 분리된 역사의 치적을 다루고 있다. 특히 자로와 자공은 관중이 공자 규(糾)를 모시고 있던 젊은 시절,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공자 규를 따라 함께 죽지 않고 오히려 경쟁자였던 공자 소백(小白; 훗날의 환공)의 휘하로 들어간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과 달리 그것을 작은 의리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 누구를 모실 것인가 하는 것은 절대적 공의(公義)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후국들을 규합하여 천하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방의 오랑캐로부터 주나라의 강토와 문화를 지켜낸 것은 역사의 긍정적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공자는 생각하였을 것이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자신보다 한 두 세기 앞선 인물들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인물도 있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인물도 있다. 다만 관중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족적을 남긴 인물의 경우에 그런 평가는 단순하거나 일률적이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면 그런 평가는 더욱 어렵다. 특히 누군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이 현재 자신의 가치관 내지 세계관에 직결되는 경우 그 평가에는 언제나 강박적인 요소가 개재하기 쉽다.

어떤 인물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의 경우 그의 부정적 측면을 평가하는 것은 힘든 일이 된다. 반대로 그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의 경우 그의 긍정적 측면을 평가하는 것이 힘든 일이 된다. 정답은 무얼까? 그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 인물의 경우 그를 둘러싼 역사의 맥락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4개의 단편에 남은, 관중에 대한 공자의 서로 다른 두 경향의 평가는 그런 강박성을 극복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객관적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은 긍정과 부정을 모순되지 않게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바로 그런 차원에서 잦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 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일제 말 그가 보인 종일(從日)적 행동들과 군사 쿠데타, 유신 도발 등 일련의 민주주의 파괴 행위 앞에서 불편해 한다. 반대로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가 집권 후 경제 부흥을 꾀하고 다방면에 걸쳐 사회를 발전시켰다는 여러 가시적 성과들 앞에서 불편해 한다. 그 불편함은 바로 그것을 평가해야 하는 사람의 시선의 단선성(單線性)에서 온다.

공자가 외견상 모순되어 보이는 두 경향으로 관중을 평가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맹자는 자신을 관중과 비교하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할 정도로 관중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었는데(『맹자』 공손추상) 그것은 유세가를 위정자보다 상위에 두려는 그의 이념적 단선성이 그를 부자유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맹자는 공자가 보인 슬기로운 선례를 따르지 못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동중서(董仲舒)마저 “공자의 문하에서는 어린아이도 오패의 일을 입에 올리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는 이야기를 하여 맹자의 입장이 승계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유가의 전통에서 이 문제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갈등하는 문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결코 간단치 않은 갈등을 보일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일에 있어서 공자가 관중을 평가하는 데에서 보인 이 선례가 지혜로운 참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문제가 된 인물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던가 하는 것은 그가 다른 시기에 보인 모습보다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초기와 중기, 말기의 행적이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그 중에서도 긴급조치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국민적 저항을 막다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부산 마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비극적 최후를 맞은 말기는 그의 삶의 대단원으로서 전체 삶에 일정한 음영을 던진다. 그 점은 천하가 인정하는 정치인으로의 모든 명성과 영화를 누리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난 관중과는 아무래도 다른 평가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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