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25

34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 왔다. 35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 보려고 36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39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입니다.”(마태오 22,34-40)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12,28-34를 마태오는 크게 줄이고 바꾸었다. 마르코에서 예수에게 질문하던 율법학자는 “당신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습니다”(마르코 12,34)라는 칭찬을 예수에게 드렸다. 그런데 마태오에서는 예수의 속을 떠 보려고 질문한 것으로 돌변하였다. 35절에서 어느 부분이 예수의 속을 떠 보는 질문인지 알기도 어렵다. 34절은 마태오가 확실히 쓴 구절이다. 40절도 예수 말씀이라기보다 마태오가 덧붙인 말 같다.

바리사이파가 모두 율법교사인 것은 아니고 율법교사가 모두 바리사이파 소속도 아니다. 율법교사 대부분 바리사이파 소속이었다. 율법교사는 요즘 말로 신학자 또는 성서학자를 가리킨다. 사제와 대사제는 그 하는 일이 율법학자와 다르다. 유다교에서 사제와 율법학자가 하던 역할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직자가 겸하고 있다. 바리사이파는 생업이 따로 있었다. 대사제를 제외한 하급 사제 대부분 생업이 따로 있었다.

전업 성직자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작품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바울도 자기 직업이 있었다. 신자들의 헌금에 대한 사용권과 결정권을 성직자가 가지고 있는 모습도 그리스도교 작품이다. 이런 모습들이 성서가 바라는 것인지, 언제까지 이런 모습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목사 신부가 따로 직업을 가지는 모습이 성서정신에 위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회에서 돈에 대한 결정권을 평신도가 가지는 것이 성서정신에 어긋난다고 보기도 어렵다. 교회에서 돈 관리는 전적으로 평신도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직자는 돈에 손대지 말고 성서공부, 설교준비, 성사(성례전)집행 등 그저 사목(목회)에 전념하면 어떨까. 국가도 은행도 능숙히 운영하는 평신도가 그보다 규모가 작은 교회 돈을 관리하지 못할까.

유다교 랍비들도 여러 관점에서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을 구분하였다. 유다교에서 지켜야 할 계명 248개와 금지 조항 365개 등 총 613이라는 숫자를 두고 그리스도교 일부에서 비웃는 경향이 있다. 자녀에게 부모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종이에 기록한다면 유다교 계명보다 그 숫자가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신명기 6,5를 답변에 인용한다. 인용된 대목에서 ‘사랑’은 유다교에서 아주 폭넓게 이해되는 개념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존중’이 주로 강조되었다.(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쓰여지는 ‘복종, 순종’이란 단어를 나는 쓰지 않겠다) ‘마음을 다하고’는 흐트러지지 않는 존중을 뜻한다. ‘목숨을 다하고’는 순교를 의식하는 표현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나 유다교에서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로 해설되었다. 느낌, 신비주의는 그에 비해 정당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지성적으로 믿음으로 보는 경향은 줄어들어야 하고, 느낌과 신비스러움 등은 더 강조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36절에서 율법학자는 가장 큰 계명 하나만 물었다.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예수의 추가적인 답변 39절이 본문의 핵심이다. 인용된 레위기 19,18의 배경이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와 무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신이 거기서 다루어졌다. 유다교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동족을 가리킨다. 유다교 문헌에도 인류 전반에 대한 사랑은 나타나지만 레위기 19,18과 연결되어 설명되지는 않았다. 오늘 본문이 독창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성서학자는 줄어들었다. 이웃의 범위를 넓힌 것이 예수의 특징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당연히 받아들여진 유다 사회와 오늘 현대사회는 그 사정이 크게 다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현대인에게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이 되어 버렸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적절한 지적처럼 예수는 인류에게 하느님을 제시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적어도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절실하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의 기초요 전제다. 이런 내용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행복하다. 이웃사랑이 특히 강조되는 오늘날이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첫째라는 것은 성서뿐 아니라 칼 라너뿐 아니라 해방신학도 강조하고 있다. 해방신학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이웃사랑에 분해시켜 버렸다는 비난은 해방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이웃사랑은 자기사랑을 기초로 한다. 자기사랑은 유다교에서 부정적으로 오해되지 않았다.그러나 특히 개신교에서 ‘행업으로 구원’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부작용으로 자기사랑이 부정적으로 강조되곤 하였다. 충실한 개신교 신도 칸트(Kant)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기사랑을 자기 자신에 반대되는 것(philautia), 그리고 자기 자신을 쫒는 것(Arrogantia)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반발은 현대에 심리학과 여성신학에서 나왔다. 에릭 프롬(E. Fromm)은 자기사랑과 자기욕구를 구분하였다. 여성의 죄는 교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무능함에 있다고 여성신학자들은 주장한다.

오늘 본문에 해방신학이 공헌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1. 해방신학은 이웃을 구조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뚜렷이 말하였다. 2. 이웃사랑을 개인윤리적 시각에서 사회윤리적 관점으로 확장한 것도 해방신학의 공헌이다. 성 프란치스코, 마더 데레사, 이태석 신부 등의 개인적 모범을 이웃사랑의 정치적 차원으로 넓힐 것을 해방신학은 강조한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로 여긴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굶주리느냐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한다”는 까마라 대주교의 말은 유명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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