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24

23 그 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24 “선생님, 모세가 정해준 법에는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25 그런데 우리 이웃에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을 하고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26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27 그들이 다 죽은 뒤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28 칠 형제가 모두 그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29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은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30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됩니다. 31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하여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본 적이 없습니까?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33 이 말씀을 들은 군중은 예수의 가르치심에 탄복하여 마지 않았다.(마태오 22,23-33)

부활에 대한 사두가이파의 질문(23-28)과 예수의 답변(29-32)이 각각 절반을 차지하고 마지막 구절은 군중의 감탄으로 끝나는 본문이다. 대본인 마르코 12,18-27을 마태오는 조금 고쳤다. “모세의 책에 있는 가시덤불 대목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글”(마르코 12,26)은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하여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마태오 22,31)으로 바뀌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마르코 12,27)는 마태오에서 33절 말씀으로 대체되었다.

마태오에서 아주 드물게 사용되는 ‘그 날‘은 본문 23절과 마태오 13,1에만 보인다. 마태오복음에서 여기와 22,34에서만 사두가이파는 단독으로 언급된다. 정치 지배층인 사두가이는 보통 바리사이와 같이 다루어졌다.(마태오 3,7; 16,1-12) 죽은 자들의 부활을 사두가이파는 믿지 않았다.(사도행전 4,1-) 모세오경에 그런 구절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천사의 존재(사도행전 23,8), 하느님의 섭리도 사두가이는 믿지 않았다. 입으로 전해오는 전승도 믿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은 바리사이, 묵시록, 지혜문학의 내용과 대립된다. 오늘 본문은 유다교 내부의 종교 논쟁을 보여준다.

부활신앙의 반대 근거로 사두가이는 유다 사회의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을 24절에서 내세우고 있다. 형사취수법은 이스라엘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훨씬 전에 생겼다. 그러나 유다 사회는 사두가이가 인용한 신명기 25,5-10이 아니라 창세기 38,8에 나오는 오난을 그 예로 보고 있다. 이 관습이 예수 시대에 실제로 실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명기 25,5는 형제들이 같은 집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사두가이들이 내세운 사례는 일곱 남자와 살게 된 사라(토비트 3,8; 6,14)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의 질문은 결혼 당사자들의 법적 관계를 주로 묻고 있다. (사두가이에 대해 우리가 아는 정보의 대부분은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 덕분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사두가이에 대해 많이 설명하지 않았다. 사두가이를 대사제계급과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경계해야 한다.)

사두가의의 질문엔 죽음 이후의 삶이 지상에서의 삶의 연장이기를 비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 그러면 히틀러나 박정희의 부활은 인류에게 끔찍한 소식이 되는 셈이다. 사두가이처럼 힘 있는 현실 정치인들이 유다교의 부활사상을 거부한 것이 눈에 띈다. 돈, 권력이 지상 최대의 판단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부활사상은 눈에 가시다. 지상에서 불의한 사람들이 부활을 가장 두려워한다. 역사의 희생자들은 부활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

30절 예수의 설명은 유다교 문헌에 이미 나타나 있다. 예수의 생각은 유다교의 부활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에게 부활은 사람의 삶이 이전 상태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 아래 새로운 삶을 가리킨다. 논증으로서 천사의 존재가 인용되었다. 하늘이 새로운 삶의 ‘장소’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출애급 3,6에 하느님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 향하는 사람은 생명을 보존하리라는 뜻이다. 유다인의 선조들은 지금 하느님 곁에서 살아있다는 뜻이다.(루가 16,23 참조) 33절처럼 예수의 가르침에 탄복하는 경우는 산상수훈(마태오 7,28), 예수의 나자렛 등장(마태오 13,54), 제자들의 반응(마태오 19,25) 등 여러 곳에서 보인다.

부활 사상에 대해 예수가 체계적으로 논증을 전개한 대목은 아니다. 부활은 의로운 사람에 대한 위로로 시작된 생각이었다. 의로운 사람만이 지상에서의 삶을 하느님께 위로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의 부활로 차차 확장되었다. 권선징악의 심판이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는 뜻이다.

페르시아 민간신앙에 있었던 죽은 자의 부활 사상이 차차 유다 사회로 유입되어 다듬어진 형태로 발전된 것 같다. 공통년(서기) 이전 2세기부터 부활신앙은 바리사이뿐 아니라 유다 사회의 민간신앙이 되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부활사상을 아직 몰랐다는 뜻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예수 부활에 기초한 바울의 편지들과 달리 오늘 단락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에의 희망,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모습, 두 가지가 오늘 본문에서 돋보인다. 부활에 대한 예수의 생각이 유다교 사상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된다. 그리스도교와 유다교는 사상적으로 깊이 이어져 있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받아들였다. 마태오복음을 공부하면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공동 운명을 깊이 깨닫길 바란다.

29절에서 예수의 적대자들은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른다고 비판받았다. 그 구절을 이제 그리스도교에게 돌려야 되겠다. 우리는 성서를 잘 아는가. 하느님의 권능을 우리가 제대로 존중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비서로 전락시킨 것은 아닌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 매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부활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교회가 고안하는 것보다 부활에 대한 교회의 모범을 보여주는 일이 더 어렵다. 먼저 교회가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돈, 권력에 무릎 꿇지 않는 교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교회, 불의에 앞장서 저항하는 교회. 그런 모습으로 교회는 현세에서 부활을 미리 사는 것이다. 그 선두에 추기경, 주교, 대형교회 목사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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