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 7]

▲ <디 벨르(Die Welle)>, 드니 간슬 감독, 2008년작
우연찮게 <디 벨르(Die Welle)>라는 독일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드니 간슬(Dennis Gansel) 감독의 2008년 작품인데요.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극적인 상상력을 보태어 만든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라이너라는 이름의 고등학교 교사가 한 학급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합니다. “우리는 과연 전체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공동체 실험을 통해 알아보자는 것이었지요. 학생들은 라이너의 제안에 대해 모두 코웃음을 치며 반응합니다. 오늘날 독일 사회에 더군다나 개인주의의 가치가 보편화한 자신들의 세대에 전체주의가 통할 리 없다는 것이지요. 독일은 자신들이 이룩한 전체주의가 과거 전 인류를 향해 저지른 죄과를 지금도 치르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반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독일인들의 머릿속에 전체주의는 아직도 끔찍한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지요.

“그래 어디 한번 볼까?” 하는 심산으로, 라이너는 어찌 보면 단순한 (친숙하기까지 한!) 몇 가지 규칙을 정합니다. 교사이자 이 프로젝트의 창시자인 자신을 부를 때 반드시 존칭을 사용하고 예의를 갖출 것,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도움이 필요한 학생과 짝을 지어 앉을 것(서로 도와 더 나은 ‘전체’를 이루자는 취지로), 발언을 할 때는 반드시 일어서서 짧고 간결하게 말할 것 등입니다.

간단한 규칙으로 시작된 전체주의 실험은 학생들의 동의와 자발적 참여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확대되어 갑니다. 학생들은 집단행동을 할 때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 흰색 상의를 갖춰 입기로 ‘제복’을 정합니다. 서로 간에 동질 의식을 높이자는 의미로 그들만의 수신호도 만듭니다. 이름도 정하지요. 바로 ‘물결(Die Welle)’입니다.

그들은 이제 집단으로 행동하고 행진할 때의 “멋스러움”과 “자긍심”을 깨닫고 그것에 서서히 중독되어 갑니다. 무엇이든 집단으로 하니 능률적이고 효과적입니다. 학업 능력도 눈에 띄게 향상되었지요.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있으니 언제나 든든하고 학교생활도 덜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물결’의 학생들은 점점 자기들끼리 뭉쳐 그룹 밖의 학생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물결’에 소속되어 있는 학생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파티를 열고, ‘물결’ 소속의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과 싸움을 할 때는 똘똘 뭉쳐 도와주기도 하죠. ‘물결’의 힘과 기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수신호를 형상화한 상징을 마을 이곳저곳에 그리고 다니기까지 합니다.

자, 이쯤 되면 “반역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실험이 점점 도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몇몇 학생들이 불편을 호소하며 ‘제복’을 벗어 던지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요. 하지만 어느덧 ‘물결’이라는 그룹의 정체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화하기 시작한 대다수의 학생들은 반역자들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혼자 잘난 체 하지 마라” “너는 왜 공동체를 분열시키려 하느냐” 등등을 따지며 그들을 따돌리고 폭력적으로 제압하기 시작하죠.

예상을 벗어난 일들은 다른 곳에서도 발생합니다. ‘물결’에 지나치게 집착하던 학생 하나는 빈 권총을 들고 나타나 라이너의 보디가드가 되기를 자청합니다. “당신이 우리 그룹의 창시자이니 우리 그룹 전체의 존속을 위해 보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은 라이너는 그제야 학생들을 교실에 모아 ‘물결’이 단순한 실험에 불과했다는 것과 바로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럴 리 없다고 자신하던 모습들을 떠올리게 하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물결’의 정체성과 함께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 학생들은 분노와 공포에 휩쓸려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벌이고 맙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대충의 전개와 결말은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제게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무섭고 끔찍했습니다. 전체주의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이 무장해제되는 과정과, 집단의 힘에 빠른 속도로 중독되어 가는 과정을 영화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영화 속의 파시즘은 단합, 화합, 통합, 협력, 민주(!) 등 “긍정적인” 가치들과 결합하여, 질서 있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스타일로 외양을 갖추고, 능률성과 효과성을 제시하며 대중을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한번 이 집단의 힘을 맛보고 소속감에 위안을 받으면, 그 이후에는 정서적, 심리적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전체주의는 심지어 “인간적”이기까지 하지요. 외롭고 불안한 이들에게 뜻을 같이하는 동지만큼 큰 위로와 위안이 되는 것이 있을까요?

▲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Elemente und Ursprünge totaler Herrschaft)>에서 전체주의를 독재자에 의한 단순한 압제와 구분합니다. ‘독재’는 쿠데타 등의 방식을 통해 경쟁자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군, 경, 언론 등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관과 제도를 장악하는 일종의 체제를 묘사하는 말이지요.

그러나 ‘전체주의’는 특정한 체제뿐 아니라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장악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입니다. 전체주의는 물질적 기반과 정신적 지향을 상실하고 일탈 상태에 놓인 대중들에게 특히 큰 파급력을 갖지요. 자신이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무능력할 뿐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대중은 방치될 경우 신체적, 정신적 자살 충동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 모든 비참함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극복할 해법까지 제시해 주는 특정한 이념과, 그 이념을 강력하게 제시하는 지도자가 등장할 경우, 특정한 목표를 향하여 광적으로 질주하는 폭력적 대중으로 바뀌지요.

전체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념은 합리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짧고, 간결하고, 자극적이며 명쾌하여 쉽게 반복이 가능할수록 유리하지요. 또한 전체주의를 이끄는 지도자는 지적으로 치밀하거나 논리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전체주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생각의 질이 아니라 생각의 부재이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사유는 불필요하거나 방해가 될 뿐이지요.

한나 아렌트의 이론과 영화를 함께 들여다보니 이번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부와 집권여당이 선거 이전부터 줄곧 주장해온 구호는 “단합”과 “화합”입니다. 그들은 이미 전체주의를 이루는 요소인 사회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강력한 기제, 외부에서 침투한 원인, ‘객관적 적(敵)’을 제시해 왔고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바로 “종북”입니다. 자신들의 이념에 반하는 모든 이들, 심지어 종교인들까지 “종북”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일단 종북으로 낙인찍히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발언권을 상실하게 되지요. “사회의 근간과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는 세력”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 대한 언어적, 물리적 폭력조차 사회적으로 용인됩니다.

▲ 보수단체 대한민국바로세우기본부 회원들이 지난 11월 26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천주교 전주교구 박창신 원로신부의 시국미사 강론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해산 등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중의소리

정치적 모토를 활용하는 것뿐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를 생산하고 활용하는 방식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부쩍 늘어난 군 관련 TV 예능 프로그램과 영화 등은 전체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군국주의가 얼마나 감각 있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21세기 한국 사회에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제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군사문화는 친화력 있고, 강하고, 신뢰감 있고, 재미있기까지 한 트렌드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이 이면에는 군국주의가 표방하는 이념을 거부하는 모든 집단과 개인의 의견은 비생산적이고, 불편하고, 불필요하고, 위협적이며, 이적성을 가진 것들로 확고하게 각인되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지요.

정부와 집권여당이 표방하는 “단합”과 “화합” 안에는 밀양 어르신들도, 철도 노동자들도, 쌍용차 노동자들도, 강정 구럼비도 없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종교인들도 없습니다. 특정 집단의 권익을 위해 봉사하는 “단합”과 “화합”은 “배척”과 “소외”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림절, 우리가 기다리는 아기 예수님과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지요. 가장 여리고 작은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권력과 재물을 돌려 왕의 지위로 올려 받들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권력과 재물을 섬기는 세상의 질서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들이 말하는 “단합”과 “화합”이라는 단어가 잘살고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사회질서를 위해 작은 생명 하나라도 거부하는 의미를 담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차라리 “분열”과 “갈등”을 추구해야 합니다. 나와 다른 목소리의 가치와, 늘 존재하기 마련인 갈등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에는 기대와 기다림의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자리도 없습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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