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식 교수, 제주교구 주최 ‘제주 4.3 심포지엄’에서 발표

▲ 박찬식 교수
8일 제주교구 평화의 섬 특별위원회가 제주 연동성당에서 주최한 ‘제주 4.3 심포지엄’에서 박찬식 교수(제주 4.3평화재단 진상조사단장)은 4.3 사건 당시 천주교회의 역할을 연구해 발표했다. 박 교수는 “교회는 신도들의 보호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기에 교회 밖의 일반 주민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막아 나서지 않았다”고 평가하면서도, 교회가 평화적 사태 해결의 원칙을 갖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한 것에 주목했다.

4.3 사건이 시작된 1948년 제주 천주교회는 해방 후 제주본당과 서귀포본당이 다시 문을 열고, 신성여학교도 수업을 재개하는 등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4월 3일 발생한 무장봉기와 이후 무력충돌의 소용돌이에서 교회 역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박 교수는 당시 제주본당 사목자였던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의 스위니 신부와 도슨 신부의 인터뷰가 실린 미국 언론 <뉴욕헤럴드트리뷴>의 기사를 근거로 4.3 사건에 대한 천주교 사제들의 인식을 분석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두 신부는 4월 3일에 시작된 봉기를 좌익의 무력투쟁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봉기의 주요 원인을 경찰의 테러와 탄압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미군 책임자에게 경찰의 테러와 고문을 중지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두 신부의 입장은 그들 스스로의 인식이었겠지만, 교회 신도들의 눈과 입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면서, “4.3 사태의 발발을 불행한 상황으로 판단하여 평화로운 해결을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편, 당시 4.3 사건으로 제주 천주교가 입은 피해는 개신교나 불교 등 다른 종단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2개의 본당과 2개의 공소 모두 읍내 중심지 또는 해안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대의 공격을 받거나 거꾸로 무장대와 연결되어 군 · 경의 지목을 받는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덧붙여 “외국인 신부들이 미군과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회는 한국 군 · 경의 보호를 받는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오히려 제주 천주교 지도급 신도 가운데에는 직접 우익청년단체에 가입해 토벌활동에 참여한 사례도 있었다. 천주교계 학교인 신성여자중학교의 교직원들은 토벌 작전의 선전부 역할을 했던 ‘선무(宣撫) 공작대’를 꾸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해를 넘어 이어진 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으로 제주 중산간 마을 주민 상당수가 죽음을 피해 한라산 속으로 피신해 들어갔고, 마을 대부분이 불타버려 주민들의 생계는 심각한 위험에 놓였다. 스위니 신부는 서울의 조지 캐롤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주민들은 짐승같이 살고 있으며, 평균 하루에 고구마 한 개를 먹고 있다”고 전했다.

조지 캐롤 신부가 구호품을 가지고 제주에 방문한 것에 이어 1949년에는 미국의 민간구호단체인 전국가톨릭복지협의회의 가톨릭구제위원회가 원조를 시작했다. 미국 천주교의 지원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박 교수는 “교회 신도들의 선무 공작대 참여, 활발한 구호활동 또한 4.3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려는 일관된 입장”이라고 평가하면서 “교회는 4.3 이후 활동에서도 평화적 사태 해결의 원칙을 실천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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