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22

1 예수께서 또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치상도 차려 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습니다. 5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7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잔치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습니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12 그를 보고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 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14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습니다.”(마태오 22,1-14)

예수가 직접 말한 것으로 여겨지는 하느님나라에 대한 비유다. 어느 임금이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두 번 초대하는 이야기다. 첫 번째 초대는 묵살당하고 두 번째 초대에는 손님들이 가득 찬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유일한 주인공은 임금이고 어떤 대화도 등장하지 않는다. 루가 14,16-24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 어휘나 형식상 마태오의 비유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1절의 그들은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킨다. 2절에서 왕은 하느님을, 왕의 아들은 예수를 가리킨다. 식사 비유는 유다교에서 새로운 시대를 뜻하지만 결혼식 잔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신랑으로 비유하는 예는 드물며 메시아사상과 결혼식 잔치가 연결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태오 공동체는 예수를 신랑(마태오 9,15)으로 표현하는데, 초대교회는 예수를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신랑으로 표현한다.(고린토후서 11,2; 요한 묵시록 19,7-9)

3절에서 임금은 종을 보내어 이미 초대한 사람들을 부른다. 식사 초대는 흔히 사람을 통해 말로 전해졌다. 로마인들은 하루 세 끼를 먹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하루 두 끼 식사가 보통이었다. 유다 상류층 일부에서 로마식으로 세 끼 식사가 행해지기도 했다. 오늘 비유는 점심식사를 가리키는 것 같다. 저녁식사를 가리킨다면 5절에서 밭에 가거나 장사하러 간다는 핑계가 이해되기 어렵겠다. 6절에서 마태오 공동체는 공동성서(구약성서)에 나타난 학대받은 예언자들을 당연히 생각할 것이지만 자기 시대에 박해받는 선교사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마태오 10,16-23)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도 있고 남을 희생시키며 사는 사람도 있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7절은 의아하다. 사람을 잔치에 초대한 하느님이 손님을 지옥에 쳐 넣다니, 이렇게 분노하는 하느님이 예수의 자비로운 아버지란 말인가. 이런 고뇌로 루터(Luther)는 오늘 비유를 ‘끔찍한 복음’이라 부르며 설교하기를 주저하였다. 탄생 몇 년 전 예수 고향 근처의 세포리스라는 동네를 로마 군대가 불살라버린 역사를 예수가 떠올리고 있는가. 로마 군대에 대한 백성들의 미움이 투영된 구절일까. 예수는 그 끔찍한 역사를 분명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제주 4.3 항쟁, 광주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는 어린이들처럼 말이다. 역사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성서이해도 더 깊어지게 된다. 성서는 가해자들의 승전 기록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이야기다.

8절에서 자격 없는 손님을 초대하였다고 자백한 임금의 말은 의아하다. 마태오는 그런 자세한 내용에 관심이 없다. 9절에 ‘거리’는 교차로나 건널목을 가리키지 않고 길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곳을 가리킨다. 임금의 통치력이 미치는 국경 지대까지 돌아다녀서 손님을 찾아오라는 뜻이다. 두 번째 초대에 잔치는 손님으로 가득 찼다. 초대받은 사람에게 예복이 지급되었는지(창세기 45,22; 판관기 14,12-) 입증하기는 어렵다. 준비 없이 초대된 사람에게 임금이 예복을 점검하다니 조금 의아하다. 복장 규정을 미리 알려주었나. 고대에 혼인잔치에 손님들이 특별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12절의 ‘예복’을 놓고 교회사에서 갖가지 해설이 생겨났다. 육신의 거룩함(테르툴리아누스), 금욕(오리게네스), 사랑(아우구스티누스)에 이어 개신교는 전통적으로 믿음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동양에서는 잔치에 예복이 선사된다는 주장에 근거해 개신교에서 오랫동안 선호되는 의견이다. 그러나 성서주석 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견이라고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Luz)는 말한다. 예복은 여기서 ‘선행’을 가리킨다. 12-13절에서 예복과 심판 이야기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14절은 인류 중 일부만 구원된다는 선언이 결코 아니다. 어떤 종류의 구원예정설도 예수의 가르침과 관계없다. 구원예정설은 그리스도교 교리에 속하지 않는다.

교체된 손님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크게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바리사이, 율법학자, 대사제등 종교 지배층이 첫 번째 초대객으로, 가난한 백성들이 두 번째 손님 2. 첫 번째 손님은 이스라엘 백성, 두 번째 손님은 이방인 3. 첫 번째 손님은 부자들, 두 번째 손님은 가난한 사람들. 1번 해설이 가장 흔하지만 3번 해설이 본문 뜻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여러분은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장애인, 시각장애인 같은 사람들을 부르시오.”(루가 6,21) 국가를 위한 무슨 기도회에 약삭빠른 목사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초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에 대한 13절 이야기가 오늘 비유의 결론이다. 예수 메시지를 거부한 이스라엘 지배층에 대한 심판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초대를 거절한 유다 지배층에 대한 심판은 비유 전반부에서 언급되었다. 초대를 받았지만 심판에서 안타까운 운명이 결정된 사례가 13절에 나타난다. 초대받음 자체는 인간의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례, 소속 종파, 신분 등은 구원의 보증수표가 전혀 아니다. 하늘 아래 자신의 구원을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다교 지배층의 운명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차라리 경고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를 믿음과 정의의 길로 초대하신다. 그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신앙의 길에서 살아남는다. 마음이 악한 자는 자신의 말과 글과 삶으로 스스로를 숨김없이 폭로하는 법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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