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21

“33 또 다른 비유를 들겠습니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그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습니다. 34 포도철이 되자 그는 그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36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37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39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습니다. 40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41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 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성서에서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고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습니까? 43 잘 들으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44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그 돌 밑에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45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노하여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다. 군중이 예수를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오 21,33-46)

유일한 대본인 마르코 12,1-12를 마태오는 조금 고쳤다. 44절은 여러 성서 사본에는 보이지 않아서 괄호 속에 표시된다. 오늘 단락은 예수가 직접 한 말은 아닌 것 같고 마태오 공동체에서 유다교와 논쟁에서 쓰이던 이야기 자료 같다. 마태오에서 반(反)유다적 색채가 짙은 대목으로 손꼽히는 단락이라서 조심스런 해설이 필요하다.

비유는 70인역 공동성서(구약성서) 이사야 5,2 이하를 연상케 한다. 1세기 이스라엘의 경제 상황에 근거한 비유다. 성서에서 노동 착취의 문제를 연구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외국에 거주하는 이민족 대토지 소유자가 유다인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아갔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인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내던 우리 조상들이 생각난다. 빼앗긴 땅에서 외국인 지주에게 소작을 부쳐먹고 사는 유다인의 아픔과 분노가 서린 비유다. 어디 식민지 백성뿐이랴. 동족 대지주에게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은 지구 곳곳에 많다. 내가 살았던 중미 엘살바도르에서는 14대 가문이 국토의 60%를 소유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재벌들은 토지를 얼마나 소유하고 있을까.

비유에서 ‘종’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가리킨다. “야훼께서 그들을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타이르셨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역대기하 24,19) “너희 조상들이 에집트에서 나오던 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나의 종 예언자들을 줄곧 보냈지만, 너희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예레미아 7,25-26) 칼에 맞은 우리야(예레미아 26,23), 문에 갇힌 예레미아(예레미아 20,2), 돌에 맞은 즈가리야(역대기하 24,21) 등 예언자의 운명은 고통스럽다. 과거에만 예언자가 잇는 것은 아니다. 동료 주교들의 방해와 견제에 시달리던 로메로(Romero) 대주교, 우리 시대 문정현, 문규현 형제신부도 있다.

38절 소작인들의 살해 음모에서 요셉 형제들의 이야기가 연결된다.(창세기 37,20) 39절에서 포도원 밖에서 일어난 종의 죽음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일어난 예수의 죽음을 연상시킨다. 로마 군대가 아니라 이스라엘 지배층이 예수를 죽인 것처럼 마태오는 여기서 암시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분명히 다르다. 40절 포도밭 주인의 생각은 다윗과 나단의 이야기를 떠올린다.(사무엘하 12,1-) 42절 “읽어본 적 없습니까?”는 반대자들과 논쟁 때 마태오가 즐겨 쓰는 표현이다.(마태오 12,3; 19,4; 22,31) 42절에서 인용된 시편 117,22 이하는 원래 예루살렘 성전전례(성례전)에서 사용되던, 아프고 버림받은 병자가 바치는 감사기도다. 유다교에서 다윗과 연결되고 후대에 메시아와 이어져 해설되는 성서구절이다. 45절에 바리사이가 등장한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마르코복음의 예수 저항과 수난 역사에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예수의 죽음에도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어설픈 내 주장이 아니라 마태오주석의 세계적 권위자인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Luz)의 말이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오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단어는 43절 에스노스(ethnos, 백성)이다. 여기서 마태오는 에클레시아(ekklesia, 교회)나 라오스(laos, 민중)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43절의 백성은 교회와 동일시될 수 없다. 마태오 공동체가 스스로 에스노스(ethnos)로 자처하지 않은 겸손함이 아주 놀랍다. 유다교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달리 자신에 대해 엄격한 마태오 공동체의 태도에서 그리스도교가 배울 점이 있다.

초대교회부터 오늘 비유를 구원사적 비유로 해설하는 흐름이 뚜렷했다. 43절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주로 해설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집단적으로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츠빙글리(Zwingli)는 유다인들이 소유욕 때문에 예수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유다교의 탈무드 문헌이 추악한 냄새로 가득하다고 비난하였다. 그런 안타까운 해설에 내 마음이 무겁다. 다행히 마태오 21,33-46은 교회전례(성례전)에서 드물게 설교되었고 반(反)유다적 문헌에서도 특별히 인용되지는 않았다.

반(反)유다적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오늘 비유는 성서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그러나 마태오에서 간간히 나타나는 반(反)유다적 태도를 우리가 상속받을 필요는 없다. 당시 유다교와 갈등을 겪고 분리된 마태오 공동체의 다급한 사정을 참조하자. 마태오 23장에서 옛날 예언자들의 상황이 현재적으로 드러나지만 마태오 시절에 연결될 뿐 현재와 연결할 필요는 없다고 가톨릭 신학자 발타사르(Balthasar)는 주장하였다. 경청해야 마땅할 의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비유는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으로 이어져야 유익하다. 예수의 경고를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알아듣기를 바란다. 유다교를 비난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교가 저절로 서는 것은 아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과 자신을 올바로 세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남을 비판해서 얻는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 비판은 방법이지 목적은 아니다. 사회비판도 자기개혁을 전제로 한다. 그리스도교가 사회를 비판하려면 먼저 그리스도교 자신을 개혁해야 한다. 교회개혁 없이 사회개혁 없다. 비단 해방신학의 주장만이 아니다. 성서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해방신학이 언제나 비판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해방신학처럼 자기개혁을 강조하는 신학이 어디 또 있을까. 해방신학자들처럼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어디 그리 많을까. 역사의 희생자를 위한 기도라야 진정한 기도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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