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20

28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하고 일렀습니다. 29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30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도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31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겠습니까?”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32 사실 요한이 여러분을 찾아 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여러분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마태오 21,28-32)

짧은 비유와(28-31) 해설(32)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비유에 등장한 두 아들은 말과 행동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신앙과 불신앙은 포도밭에 가서 일하느냐 일하지 않느냐로 평가된다. 즉, 믿음은 실천에 따라 결판난다. 28절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예수의 질문을 듣는 사람은 앞 단락에 나타난 대사제들과 원로들이다. 대사제는 요즘 말로 종교지배층 또는 고위 성직자를 가리킨다. 지금 한국에서 가톨릭주교나 대형교회 목사에 해당된다고 이해하자. 원로는 재벌급 부자를 가리킨다. 그런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질문하는 성직자나 신학자가 오늘 있는가. 동족 이스라엘의 종교지배층과 경제 지배층에게 예수는 질문하고 있다. 28절 ‘얘야’는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자애로운 태도를 나타낸다. 번역문에는 보이지 않지만 30절 원문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네, 주인님”하며 정중하게 응답하고 있다.

비유의 핵심은 하느님의 부탁과 인간의 대답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지 않으시고 부탁하신다. 인간에게 복종을 요구하시지 않고 인간의 존중을 기다리신다.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쓰이는 ‘복종’이란 단어가 간접적으로 불의한 정치체제 유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설교자들의 부당한 요구에 신자들은 당연히 저항해야 한다. 의로운 자는 적게 약속하지만 크게 실천한다. 불의한 사람은 크게 약속하고 적게 실천한다. 하느님의 부탁에 처음에 말로는 ‘예’ 하지만 나중에 실천으로 ‘아니요’ 라고 응답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세례 받은 사람 중에 사실상 무신론자가 많다. 종교지배층에 사실상 무신론자가 적지 않다. 하느님의 부탁에 처음에 말로는 ‘아니요’ 하지만 나중에 실천으로 ‘예’라고 응답하는 사람이 있다. 겉으로 무신론자이지만 사실상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자.

두 아들 비유에서 누가 주인공일까. 처음에 말로는 거절하지만 나중에 실천으로 받아들인 큰 아들이 주인공인가. 그렇다면 회개하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위로가 비유의 핵심 메시지다. 처음에는 말로 ‘예’ 하지만 나중에 실천으로 거부한 둘째 아들이 주인공인가. 그렇다면 실천하지 않는 신앙인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가 비유의 핵심 메시지다. 31절 대사제들과 원로들의 답변을 주목하자. 그들도 예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며 찬성하고 있다. 그들도 말로는 예수와 같은 의견이었지만 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혼났을까. 믿음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실천으로 삶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믿음을 말로 평가한다면 1천만 명이 넘는다는 대한민국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성도들은 벌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남았을 것이다. 국민 전체의 20%가 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정도의 나라가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세리와 성 노동자는 당시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예수는 그들에게 먼저 다가간다.(마르코 2,13-17; 루가 18,9-14; 요한 7,53-8,11) 세리와 성 노동자의 회개는 아주 어렵다고 여겨졌다. 회개하기 어려운 사람의 대명사격인 그들을 왜 예수는 해설에 등장시켰나. 종교지배층과 부자들의 회개가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예수는 말하는 것이다. 주교들과 대형교회 목사들과 재벌들의 회개가 가장 어렵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것 같다.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에서 주교들과 대형교회 목사들과 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다소 기분은 나쁘더라도 세리와 창녀들 뒤에 서더라도 결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보장하는 말씀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스스로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져 갔다. 31절에서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 현재시제 동사가 보인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에 대한 말씀이 나타나는 대목이다.(마태오 5,20; 7,21; 18,3; 19,23) 60만 군인을 위해서 교구, 주교, 수십 명의 신부가 있지만 대한민국 성노동자를 위해 몇 명의 주교와 신부들이 관심 갖고 일하는지 궁금하다. 노동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또 어떤가.

마태오복음 저자는 왜 이 대목에서, 예수 처형 며칠 전에 세례자 요한 이야기를 꺼내는가.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 마태오의 특별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메시지를 듣기 전에 벌써 세례자 요한의 메세지를 들었어야 했다며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나무라는 것이다.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던 구절을 기억하자.(마태오 3,15) 세리와 창녀들은 요한의 메시지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이다.(마태오 9,9-)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지 않고 지배층과 다른 계층을 구분하는 마태오의 조심성이 돋보인다. 마태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배층을 비판하는 것이지 백성 전체를 싸잡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마치 저주받은 백성(massa perditionis)으로 설교해온 그리스도교 일각의 관행은 잘못된 것이다.

두 아들은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에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으로 소개되었다. 일하러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결국 일하러 가지 않은 둘째 아들은 유다인,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간 큰 아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비유되었다. 유다인에 대한 바울의 항의(로마서 2,13)가 여기에 자주 인용되었다. 믿음을 강조하나 실천하지 않는 개신교 성도를 둘째 아들, 큰 아들을 가톨릭 신도로 해설되기도 하였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성직자와 주저하지만 결국 실천하는 평신도로 구분되어 해설되기도 하였다. 모두 성서 본문과 직접 관계없는 해설이다. 그런 잘못된 악의적인 해설에 속지 말아야 한다. 착한 목자도 많지만 악한 목자도 많듯이, 착한 성서해설자도 있지만 악한 성서해설자도 많다.

세리와 성 노동자가 고위 성직자나 재벌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 예수는 말한다. 가톨릭교회의 주교, 대형교회 목사, 재벌그룹 회장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들에 대한 모욕으로 혹시 느끼지는 않을까. 성 노동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는 있는가, 신학자들에게 묻고 싶다. 예수의 이 말씀은 신학자들에게도 파격적으로 들리는 구절이다. 누구는 구원 받네 못 받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 말씀 앞에 깊이 고뇌해 보시라. 하느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 하느님 그릇은 우리 그릇과 다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