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26]

지난 글에서는 요한 복음(9,22; 10,38-39; 11,47-50)을 묵상하며 ‘카야파가 말한 “여러분”을 한국 교회에서 본다’란 제목을 글을 실었다.

오늘은 공관복음을 통해 왜 예수님이 그토록 그들에게 미움을 받고 살해당하기까지 했는지를, 그리고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길을 함께 성찰한다. 대사제 카야파가 말한 ‘여러분’과 예수님 사이는 말 그대로 생사를 건 싸움,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배경이 마치 오늘의 우리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신앙의 고백, 곧 우리의 죄 때문에 스스로 하느님 앞에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대속 신학적 해석’이 가능함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예수님의 이 희생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앙이 예수님을 살해한 이유를 간과해도 된다는 보증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그 이유를 한 순간도 잊어서도 간과해서도 안 되는 분명한 근거가 된다. 잊거나 간과한다면, 우리 스스로 예수님의 희생을 공허하게 만들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환전상을 몰아내시다>, 렘브란트, 1626년
공관복음을 보면 그들, 곧 대사제 카야파가 말한 ‘여러분’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겠지만, 결정적인 범죄 동기(?)를 꼽으라면, 아마도 ‘성전 정화’로 알려진 예수님의 도(?)를 넘은 행위일 것이다.

성전! 얼마나 거룩한 곳인가? 그렇지만 그 거룩함이 예수님에게는 겉모습뿐이었다. 경건한 유다인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실현된다는 것쯤은 지극히 당연했다. 성전도 바로 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곳이어야 하며, 그 올바른 관계의 원천이 되는 곳이어야 하며, 그 올바른 관계를 실재로 드러내는 곳이어야 했다. 그렇지만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일부의 유다인이 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강도의 소굴’이 구약성경의 예언서(예레 7,11)를 인용한 표현이라고 해서 단순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모든 유다인은 성전세라는 것을 내야 했다. 그만큼 성전에는 ‘돈’이 모인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아무 주화나 바치는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환전해야 했다. 물론 1:1로 환전했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이른바 환차익이 생기는 것이다. 그냥 앉아서 돈이 모인다.

게다가 모든 유다인은 반드시 성전을 찾아야만 했는데, 이때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율법의 규정대로 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제국 내 곳곳에서 성전을 찾는 유다인들이 자기 살던 곳에서 제물을 마련해서 먼 길 떠났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성전과 그 주변에서 돈을 주고 제물을 마련했을 것이다. 이때도 물론 수익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렇게 재물이 모이는 곳이 바로 성전이었다. 돈이 모이는 곳, 요즘말로 ‘은행’쯤 될 것이다.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 그냥 쌓아두기만 했을까? 성전을 관리하고 운영하며 필요한 경비를 대는 데 다 썼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남은 것을 힘들고 약한 이들을 돕는 데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림 제2주일 복음에서의 세례자 요한의 질책〔“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이나 예수님의 질책〔“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루카 20,47)〕 등을 감안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막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던 그들은 그것으로 무엇을 했을까? 그냥 ‘얼마가 있나?’ 하며 세어보기만 했을까? 상식적으로 그럴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로마 제국에 보험도 들었을 것이다. 또 요즘말로 투자도 했을 것이며, 그 투자 수익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서민, 곧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부업도 했을 것이다. 이때 신용대출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담보물을 확보하지 않았을까? 대출금과 이자를 갚지 못하면 담보물을 몰수했을 것이다. 재산 가운데 으뜸은 아무래도 토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성전은 성전세와 환차익으로, 제물 판매로, 그리고 투자와 투자이익, 대부이자수입과 몰수한 토지가 몰리는 곳이었다.

이 막대한 자금을 누가 소유했고 누가 관리했을까? 성전 관리들과 사제 계급이 맡았다. 가뜩이나 로마의 지배로 허리가 휠대로 휜 보통의 유다인에게 ‘성전’은, 겉모습은 분명 거룩한 ‘성전’이되 사실은 ‘강도들의 소굴’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휘둘렀으며, 환전상을 내쫓았으며,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백성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고, 희망을 북돋아주고, 용기를 불어넣어도 모자랄 판에 백성을 고통으로 내몰며 축재하는 당신들은, 카야파가 말한 ‘여러분’은 진짜 ‘강도’라고 말이다.

듣기에 기분도 나빴겠지만,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는 사실 그들의 권력과 재력의 추악함을 만천하에 공개 고발한 것이었기에, 그들에게는 만행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군중은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마르 11,18).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위와 말씀은 군중, 곧 대부분의 힘없어 아무것도 못하고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유다인에게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던” 군중에게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다.

그러나 카야파가 말한 그 ‘여러분’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세관장 자캐오처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뉘우치며 네 배를 갚지 않을 것이라면, 예수님을 제거하는 길 말고는 그들에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그곳에서 예수님을 제거하게 된다.

세계 경제 10위권의 경제성장을 노래하고, ‘잘 살아보세’ 하고 노래하는 나라, 없는 것이 없는 풍요로운 나라, 게다가 애국 애족이 흘러넘치는 나라, 바로 이 땅에서 수많은 힘없고 약한 사람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 빈곤과 배제와 죽음의 고통으로 내몰리고 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이들의 일탈을 외면하거나 침묵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뇌’를 자기 몫으로 삼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침묵하고 외면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 ‘중립’ 혹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현재의 질서에 대한 동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이기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기도 하다(사목헌장 1항 참조).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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