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19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24 “나도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는지 말하겠습니다. 25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습니까? 하늘이 준 것입니까? 사람이 준 것입니까?” 하고 반문하시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그 권한을 하늘이 주었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26 사람이 주었다고 하면 모두들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으니 군중이 가만있지 않을테지?” 하고 의논한 끝에 27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오 21,23-27)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11,27-33의 구조와 순서를 마태오는 그대로 따른다. 유다교 지배층의 두 가지 질문(23), 예수의 반문(24-25), 유다교 지배층의 논의와 답변(25-26), 예수의 답변 거부(27)로 이루어진 오늘 단락이다. 그러나 마르코와 다르게 보이는 곳이 있다.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마르코 11,27)는 ‘성전으로 들어가서’(마태오 21,23)로 바뀌었다. 마태오복음의 특징 중 하나인 ‘가르치는 예수’의 모습이 더 강조되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마르코 11,27)은 대사제들과 원로(마태오 21,23)으로 바뀌어 율법학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큰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마태오는 특히 주목한다. ‘그들이 군중을 두려워해서’(마르코 11,32)는 ‘우리가 군중을 두려워해서’(마태오 21,26)로 바뀌었다. 군중에 대한 유다교 지배층의 두려움이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다시 성전에 등장한다.(마태오 21,12-) 예수는 성전항쟁을 벌인 후에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성전에 끈질기게 나타난 것이다. 대한문과 강정에서 끈질기게 애쓰는 종교인들이 떠오른다. 구체적으로 성전의 어디에서 가르쳤을까. 성전항쟁을 벌인 바로 그곳 이방인의 마당인 것 같다. 거기서 일하는 상인들의 보복이 예수는 두렵지 않았을까. 그런 자세한 반응에 마태오는 관심이 없다. ‘백성의 원로들’이란 표현은 마태오에서 여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공동성서에서 따온 것이다.(이사야 3,14; 예레미아 19,1) 그들은 부자들로서 예수를 탄압하는데 적극적이다.(마태오 26,3; 27,1.3; 28,11-)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기관인 최고의회는 대사제, 율법학자, 원로들로 구성되었다. 종교적 주제에 대한 논쟁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가 예수의 주된 상대였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과정에서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자주 나타난다. 예수의 토론 상대자와 갈등 상대자를 잘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는 예수 죽음의 과정에서 역할이 거의 없다.

예수에게 호의적인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최고 권력기관 사람들이 예수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가난한 예수에게 질문하는 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알기 위해 하는 겸손한 질문이 있고 훈계성 질문도 있다. 말이 질문이지 그들의 질문은 취조나 심문과 비슷한 ‘이실직고 하렸다’ 분위기다. 마태오야 예수 편이니 마치 예수가 상황을 주도하는 것처럼 차분히 보도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이보다 훨씬 더 험악했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백성과의 소통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은 백성의 아픔을 기억하지도 않는다.

23절 ‘이런 일들’은 치유 사건뿐 아니라 성전항쟁도 포함한다. 대부분 성서학자들은 유다교 지배층의 질문에서 성전항쟁보다 예수의 가르침 부분에 더 주목한다.(그닐카)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가르침에 대해서라면 대사제들과 원로들보다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가 질문해야 적격이다. 유다민족 실세인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권력문제에 민감하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보다 성전항쟁에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누가 성전항쟁을 시키더냐는 추궁이다. 예수에 대한 유다교 지배층의 질문에 예수는 겁먹지 않고 요한에 대한 반문으로 응수한다. 반문(反問)은 당시 유다교에서 즐겨 쓰던 토론 수단이다. 치유이적을 행한 적이 없는 세례자 요한을 예수가 반문하면서 언급한 것은 본문의 대화가 주로 성전항쟁에 대한 것임을 더 뒷받침한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라는 두 예언자의 운명을 연결하는 것이 특히 마태오의 관심사다. 오직 마태오에서만 세례자 요한이 하늘나라를 선포한다고 보도되었다.(마태오 3,2; 4,17) 요한의 세례에 대해 예수는 질문한다. 신학적으로 식견이 변변찮은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무엇을 얼마나 제대로 답변할 수 있을까. 25-26절에서 그들의 논의 내용을 예수나 마태오는 어떻게 알았을까. 마태오가 미국정부처럼 남의 나라 대사관을 도청해서 안 것이 아니라 상상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이다. 마태오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1. 군중이 예수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다. 2. 유다교 지배층은 군중을 두려워한다. 27절에서 모르겠다고 답한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답변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떳떳하지 않은 사람의 답변은 결국 구차하다.

유다교 지배층의 함정 질문을 예수가 통쾌히 모면한 것에 흥분해야 하는가. 오늘 단락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유다교 지배층과 예수의 갈등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 갈등은 종교적 주제에 대한 의견차이 때문이 아니라 성전항쟁으로 빚어진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다. 성전항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은 대사제들과 원로들이다. 대사제들은 성전시장 운영권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임대수익을 올렸다. 원로들은 시장에서 팔리는 물품을 공급하면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 그들은 종교와 경제의 동맹세력이다. 성전에서 로마신에게 제사지내도록 요구하던 로마군대도 물론 타격을 입었다. 예수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죽음의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암시를 마태오는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본문의 ‘원로’는 재벌과 정치인을 가리키겠다. 대사제들은 오늘 누구를 가리킬까. 권력자, 부자들과 손잡고 이익을 노리는 종교지배층을 가리키겠다. 성서를 가장 읽기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교회 지배층일 것이다. 불의한 지배층은 왜 군중을 두려워하는가. 의로운 권력이나 세력은 경찰이나 용역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불쌍한 젊은 경찰을 화단을 지키라고 파견할 필요도 없다. 당당한 권력자라면 시장을 경호원 없이도 편안히 산보할 것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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