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강정마을의 평화활동가 유랑단 평화바람 막내이자 평화상단협동조합 일꾼으로 활동하는 재이(Jay) 씨. 그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하나다. 훤칠한 키에 나풀거리는 천 바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그는 요즘 서울에서 감귤을 파느라고 분주하다.

제주 강정을 오간지는 벌써 4년여. 평화바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된지도 2년이 됐지만 그는 ‘활동가’라는 호칭은 너무 무겁다고 했다. 그냥 ‘그곳에 있는 나’이므로 이름을 불러 달라고, 그리고 당장 내일은 어떤 삶을 살지 알 수 없지만,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 지난 여름,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참가한 재이 씨(맨 왼쪽). (사진 제공 / 재이)

지극히 평범했던 재이 씨, 일탈(?)의 이유는?
촛불집회, 시국미사, 세례, 그리고 강정

모르긴 해도 스물 몇 해 이어진 그만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급진적 전환이 이뤄졌다. 취업과 현실적 삶을 위해 뛰어야 할 나이에 돈벌이를 제대로 못하는 것은 물론, 강정마을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끊임없이 맞서야 한다. 세속적 기준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이유는 뭘까?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가르치는 대로 배우고 사회생활을 하던. 그런데 처음으로 2008년 촛불집회라는 것을 해봤어요. 그때는 정부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순진한 마음에 촛불을 들면 대통령이 내려올 줄 알았어요. 하하. 그리고 그해 있었던 시청 광장의 시국미사를 목격하게 됐죠. 제 눈엔 정말 딴 세상이었고 멋있기도 했어요.”

인도 ‘마더 데레사 하우스’에서 만났던 가톨릭 신학생들의 성실함이 인상 깊었고, 시국미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천주교에 입교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해에 세례를 받고 ‘마리 스텔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제주 강정을 알게 된 것은 문정현 신부의 트윗을 접하면서다. 제주도는 원래 좋아하던 곳이어서 자주 여행을 갔지만 강정마을에 가본 적은 없었다. 마침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주례하는 미사가 예정됐고, 지인이 제주에 있어 강정행을 결심했다. 2011년 9월이었다.

“강정에서 이틀째인가 됐는데, 새벽에 사이렌이 울렸어요. 비상사태를 알리는 소리죠.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사람들과 나가보니,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두운데 차량 불빛으로 경찰들 헬멧이 보였어요. 사이렌은 귀를 때리고 주민들은 싸우고 있었죠. 전쟁이었어요. 바로 그날이 구럼비에 펜스를 치던 9월 2일이었어요.”

주민들이 싸우다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 경찰이 사제들을 들어 옮기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무서웠다. 강정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떠났다가 마음을 달리 먹고 돌아와 일주일간 머물렀다. 겨울이 되어 다시 찾은 강정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또 오겠습니다”라는 약속…강정에서 뭔가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조금 여유를 갖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다. 마을에서 살고 있는 활동가들과 이야기하면서 잠깐씩 방문한다는 것이 왠지 미안했고,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저녁 강정마을에서 열리는 문화제에서 “또 오겠습니다”라고 인사했던 말도 지키고 싶었다. 부산에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 강정으로 들어간 것이 작년 봄. 그 후 강정의 시간은 역동적이고 빠르게 흘렀다.

“처음에 해상 감시팀 활동을 같이 하게 됐어요. 끝내 정의와 믿음이 승리한다고 믿는 이들 옆에 있고 싶었어요. 그런 반면 왜 비폭력 투쟁이어야 하는지 이상했어요. 이렇게 정부와 경찰이 폭력적인데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는 동료들이 조용히 절을 하고 기도를 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너무 궁금했어요.”

그 궁금함 때문에 지켜보고 함께한 시간은 그를 많이 변하게 했다. “만약 다듬어지지 않은 분노를 분출하기만 했다면 지금껏 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 10월 12일, 평화바람 꽃마차 기증식에서 동료들과 함께(맨 왼쪽). ⓒ정현진 기자

평화바람, 평화상단 막내둥이로
감귤 300박스 포장 쯤 천하 쉬운 일!

그러다가 문정현 신부가 있는 평화바람 활동을 하게 됐다. 지금은 평화상단협동조합이지만 당시는 평화상단이었고, 강정마을 후원사업으로 농산물과 해산물을 팔고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면 나서는 편이라서 필요하고 해야 할 일이니 그냥 열심히 했을 뿐이라는 재이 씨는 “내적 갈등 같은 것은 할 사이도 없이 바쁘다”며 웃었다.

주문과 상품 포장, 배송 같은 일은 해보지 않아서 당연히 힘들었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서로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고 도우면서 함께 해나갔다. 최근에는 협동조합 생산자 조합원의 밭에서 일도 거든다. 귤을 따고 감자를 캐면서 힘은 들지만, 덕분에 그들의 형편과 입장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됐고, 이제는 가족 같다고 말한다. ‘삼촌’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레 입에 붙은 그는 강정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입가에 웃음을 담는다. 강정은 이제 그의 동네다.

“그냥 물건을 팔 때는 잘 몰랐는데, 농사일이 얼마나 많은 수고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그동안 마을 주민들이 왜 더 자유롭게 싸움에 참여할 수 없었는지도 알게 됐어요. 올해 농사는 잘 됐는지, 걱정도 해주고 더 애틋해졌죠. 당연히 수매가도 더 많이 드리려고 하고요. 처음보다 수매가가 낮아져도 원래 계약 가격을 유지하려고 해요.”

그는 누구보다 평화상단협동조합을 통해 상품을 구입하는 이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꾼들도 있지만 전국 각지에서 주문해주는 이들 덕분에 이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전문 쇼핑몰이 아니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많은데도 다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정말 고맙다는 그는, “오히려 쏟아지는 격려 메시지 덕분에 힘이 난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꼭 항의도 해주시기 바란다”고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얼마를 머무르느냐가 아니라, 끝까지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해요”
편견을 깨고 새로운 감수성을 받아들인 시간들

잠깐 왔다 가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어떻게든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강정을 선택한 재이 씨. 2년 넘는 시간 동안 미안한 마음이 가셨느냐고 물었다. 그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얼마나 머무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잠깐씩 찾더라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죠”라고 답했다.

그동안 변한 것은 더 있다. 제주공항에서 600번 버스를 타고 동네 어귀에 들어섰을 때의 편안함, 동네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일상을 나누는 것 등이다. 여전히 평화나 인권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통해 체득한 뭔가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 변한 것이 생각났어요. 사실 노동자, 파업, 이런 것들에 편견이 있었어요. 그런데 작년 여름 쌍용차 해고자들 순회 투쟁에 참여했거든요. 그때 노동자들이 누구인지, ‘함께 살자’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어요. 무섭고 거칠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연대가 무엇인지 배웠어요.”

▲ 재이 씨는 인터뷰 내내 쑥스러워 했다. 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신이 인터뷰를 할 자격이 되는지도 연신 물었다. ⓒ정현진 기자

그날의 일을 주어진 대로 할 뿐, 내일은 미리 생각하지 않아
변화와 평온 사이 끊임없이 갈등해도 나답게 살기 위해

그는 예전에는 투쟁, 싸움 같은 과격한 단어가 싫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언어를 공유하게 됐다고 한다. 과격함이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격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제 그에게 ‘투쟁’은 연민과 연대, 이해의 단어다.

“제주 말에 ‘당일 바리’라는 말이 있어요. 오늘 잡은 생선을 오늘 판다는 뜻이에요. 내일 뭘 할지, 강정에 있을까, 떠나게 될까, 미리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오늘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해 답하는 것뿐이죠. 이 역시 신부님들과 동료들을 통해 배웠어요. 그날 나에게 도전해오는 것에 성실하게 답하는 거죠.”

그는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활동가’라는 이름도 사양한다고 했다. “완전무결해야 할 것 같잖아요. 저는 단지 제 이름으로 불리고, 존재 그대로 사는 것이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가 강정마을에서 가장 많이 얻고 배운 것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지금 그의 모습을 찾고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그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사람’이다. 다양한 이들을 만나면서 실망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늘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재이 씨는 “요즘 나다운 모습을 찾은 것 같다”면서 “여전히 분노와 평온, 변화와 안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다움과 자유로움을 지키면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재이 씨는 지금 잠깐의 휴식을 위해 강정을 떠나 본가가 있는 서울에서 머문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찾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앞으로 평화상단협동조합 판매 일정을 친절히 알려준다. 곧 제주 친환경 지슬(감자)을 팔 것이고, 1월부터는 한라봉을 판단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직 다 팔지 못한 감귤이 걱정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귤 하영 사줍서~” 귤 많이 사달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 고객들을 기다리는 평화상단협동조합 감귤. “300박스 포장 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진 제공 / 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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