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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에 사로잡혀 삶을 잃은 이들을 생각하며[아래로 흘러가는 노래 - 9]

“이 말씀 한번 읽어 보실래요?”

다혜 어머니는 오늘도 나에게 “말씀”을 건네주었다. A4 용지 서너 장에 인쇄된 ‘말씀’들은, 다혜 어머니 말에 의하면, 성자께서 ‘선생님’을 통해 말씀해주신 내용들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남을 위한 희생과 사랑의 삶을 살아오셨다는 선생님은 ‘성자 분체(聖子 分體)’로서 자신의 말씀을 교인들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다혜 아버지는 이곳 지방의 교회에서 ‘말씀’을 담당하고 있는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현재 감옥에 수감된 선생님의 말씀을 인쇄해서 교회 신자들에게 전달한다.

다혜 어머니는 20여 년 전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남편과 만나 두 딸을 낳고 살고 있다. 젊은 시절 막막한 인생살이와 외로움으로 고립감에 빠져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이 교회는 그동안 그녀가 접한 어떤 종교단체보다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가난하고 배움도 많지 않은 순박한 다혜네 가족은 사회적 지위나 재력이 없으면 교회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소외된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를 알게 된 후로는 선생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젊고 건강한 다혜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렉카(사고견인차)를 운전하고 있고, 다혜 어머니도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중증 장애를 가진 큰딸과 중학생인 둘째 딸을 양육하고 있다. 두 사람의 수입은 교회의 가르침대로 십일조를 내고, 수시로 교회에서 요청하는 특별헌금들을 정성껏 바치는 데 쓰이다 보니, 30대 후반의 다혜네 부모는 여전히 15평 아파트를 임대하여 살고 있다. 다혜 어머니는 선생님의 고향인 충청도 어느 곳에 10만 청중집회를 할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을 완공했는데, 그곳에 조성된 조형물들과 여러 시설들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뜬 목소리로 자랑하며 함께 다녀오자고 권한다.

“어때요? 말씀이 참 좋죠?”

다혜 어머니가 건네준 종이를 대충 훑어보며 생각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선생님과 교회의 영향으로 가득차서 자유로운 사고가 어려워진 것이 아닐까? 다혜네 집 곳곳에 붙어있는 선생님의 사진이며 말씀으로 그녀의 사고는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자신들의 생활에 대해 걱정하거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 상담하다가도 선생님의 말씀을 들먹일 때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얼굴에 화색이 돈다. 모든 사유는 교회의 가르침으로 종결되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도 감옥에 갇혀있는 선생님이 만사를 꿰뚫어보고 알려주시는 말씀대로 받아들인다. 교회가 어떻게 그녀의 삶을 사로잡았을까?

“크리스트교를 독실하게 믿는 지역의 교회들에서는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자는 사탄의 노예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는 걸 기억해라. 그런 슬로건을 내거는 설교자들은 믿음의 문제에 관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순간, 사탄이 우리 어깨에 올라타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믿음을 설파하지. 그런 설교자들은 자신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에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오만함으로 인해 결국 지옥으로 떨어져 버릴 어리석은 자’라는 생각을 갖길 원한단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 스티븐 로, 와이즈베리, 2011)

다혜 어머니가 교회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던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색해진다. 오히려 종교적 신념에 세뇌되어 이성적 사유도, 인간적인 감성의 발현도 철저하게 억누르고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나약함이나 허점, 그리고 부끄러운 실수도 자기가 속한 집단의 허세로 감추려 한다. 현실에서 대면하게 되는 문제들도 지도자들이 설파하는 가르침으로 가리고 자신들의 소박하고 순진한 믿음으로 덮어버린다.

“그러기에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도 <신학정치론>을 내면서 이렇게 묻는다. 민중은 왜 그토록 비합리적인가? 민중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자유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왜 그토록 어려운가? 왜 종교는 사랑과 기쁨을 내세우면서 전쟁, 편협, 악의, 증오, 슬픔, 양심의 가책 등을 불러일으키는가?” (<스피노자의 철학>, 질 들뢰즈, 민음사, 2012)

어쩌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추종자들이 아닐까? 때로는 무지로 인해, 때로는 욕망을 위해, 때로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억압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환상의 그림을 바라보며 소수 지배자들의 언어적 희롱에 영혼을 빼앗기고 값싼 자비를 애걸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니 나치 시대 독일인들을 쥐고 흔들었던 요제프 괴벨스가 “민중은 단순하다. 빵 한 덩어리와 왜곡된 정보만 주면 국가에 충실한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할만하다.

다혜 어머니가 보여준 ‘말씀’을 바닥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수십만 평에 달한다는 그 교회의 자연성전에는 관심 없어요. 그보다는 다혜 어머니가 언제 아파트를 분양받게 될지가 더 궁금해요.”

그 주체가 국가이건 종교이건 다혜네 가족처럼 극단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삶을 저당 잡힌 사람들이 자기를 바로 보고 참 자유를 얻기를 기원한다. 어쩌면 가난한 자를 위한 국가나 종교는 없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이장섭 (이시도로)
아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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