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15

29 그들이 예리코를 떠날 때에 큰 군중이 예수를 따라 왔다. 30 그런데 소경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사람들이 떠들지 말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2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부르신 다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셨다. 33 “주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34 이 말에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은 곧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따랐다. (마태 20,29-34)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10,46-52에서 마태오는 설명 부분을 크게 줄였다. 거지 바르티메오 대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소경이 등장한다. ‘예수 일행이 예리코를 들렀다’(마르 10,46),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마르 10,47)라는 부분이 마태오 복음서에서 없어졌다.

사람들이 소경에게 예수의 부르심을 전하는 부분(마르 10,49-50)은 예수가 소경을 직접 부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소경이 겉옷을 벗어 버리고 벌떡 일어난 장면(마르 10,50)도 사라졌다. “선생님”(Rabbuni / 마르 10,51) 대신 “주님”이라는 호칭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마르 10,52) 부분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로 바뀌었다. 소경의 믿음보다 예수의 측은지심이 더 강조된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시다>, 17세기 프랑스 화가 외스타슈 르 쉬외르 작품

같은 사건을 두고 저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 곳이 성서 곳곳에 있다. 삭제하고, 새로 끼워 넣고, 단어를 바꾸는 등 말하자면 ‘편집’을 하는 것이다. 성서 저자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 저자마다 시각이 다르고 강조하고 싶은 점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무오설을 좁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어떻게 처리할까. 성서 베껴 쓰기가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도 있다. 성서는 절대로 독학하면 안 된다. 환자 보호자가 병원을 매일 들락거려도 의사가 될 수 없다. 아프면 돌팔이를 찾지 않고 의사를 찾아가듯이, 성서를 알려면 괜찮은 성서학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좋다. 엉터리 설교자에게 성서를 배우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예루살렘을 향해(마태 20,17), 요르단강 건너편(마태 19,1)에 이어 다시 정확한 지명이 소개되었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함께 예수는 이 길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간다. 예리코는 헤로데 대왕 때 새로 만들어진 도시로 헤로데의 겨울 별장과 극장도 있던 그리스 색채가 강한 도시였다. 종려나무가 많고 오아시스가 있으며 지중해 해수면보다 250m 낮아서 해발 790m의 예루살렘과 고도차가 1,000m가 넘는 지역이다. 여기서 36㎞를 더 가서 예수 일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두 소경은 예수를 집에서가 아니라 거리에서 만났다. 예수를 주로 성당이나 교회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를 거리에서, 시장에서, 일터에서, 시위 현장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고통 받는 사람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 곁에 있다.

예수를 부르는 안타까운 외침에 “다윗의 자손”과 “주님”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다윗의 자손’은 유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주님’은 그리스 문화에서 사는 공동체에게 익숙한 단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예수가 백성의 병을 고쳐주고 임금으로 등장할,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뜻을 알리기 위해서다.

백성에게 측은지심을 갖는 예수의 모습이 특히 강조되었다(마태 9,36; 14,14; 15,32). 백성에게 측은지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 측은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눈이 먼 지도자도 있다.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지만(마태 4,16) 눈먼 지도자들은 보지 못한다(마태 15,14; 23,16-26). 눈뜬 소경 이야기는 눈먼 유다 지도자들을 직접적으로 대조하고,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교회에서 오늘의 본문은 주로 비유적으로 해설되었다. 예리코는 히브리어 어원으로 ‘달의 도시’라는 뜻이다. 거기에서 착상하여 예리코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다른 빛을 기다리는 세상으로 비유되었다. 예수는 세상을 해방시키는 빛이다. 두 소경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다와 이스라엘로 여겨졌다. 두 소경이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에 비유되기도 하였고, 또는 유다인이 주축인 교회와 이방인이 주축인 교회로 해설되기도 하였다. 예수를 기다리는 개인의 대표자로 두 소경이 언급되기도 하였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눈먼 사람들이다.

끈질기게 자신의 소망을 예수에게 털어놓은 두 소경은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다. 옳은 지향을 가지고 끈질기게 예수에게 매달리라는 가르침이다. 눈뜬 소경의 기쁨을 독자들도 같이 나누라는 뜻이기도 하다. 남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이다.

소경들은 눈이 뜨인 다음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나서 비로소 눈뜨게 되었다. 예수를 제대로 만나면 마음의 눈도 뜨게 된다. 눈만 뜬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뜬 다음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같이 간다. 그 후 그들의 행적에 대한 보도는 없다. 열두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많았다.

교회는 열두 제자를 주로 언급하지만 다른 제자들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일제식민지 독립운동에 어디 이름난 사람만 애썼던가. 이름 없는 사람들을 이름난 사람들보다 더 기억하고 배려하는 세상이 그립다.

이름 없이 세상을 빛낸 모든 사람들에게 꽃을 바친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진정한 공헌자이고 주인공이다.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역사 속으로 숨어버린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그립다. 그의 아름다운 자세를 존경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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