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싸움을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제목은 <밀양전>.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의 싸움이 벌써 9년째. 게다가 지난 10월 한국전력이 열두 번째 공사를 강행하면서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었으니, 그 기록을 ‘밀양의 전쟁’, 밀양전이라 이름붙인 것이 납득할 만하다.

그런데 전쟁의 참혹함을 직면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큐멘터리를 보기 시작한 관객들은 조금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우선, 그런 ‘치열한 전쟁’의 기록은 총 상영시간 73분의 절반을 넘어서는 35분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카메라는 오히려 움막을 지키는 할머니들이 밥을 지어 먹고 수다 떠는 일상에 집중한다. 그리고 주인공으로 내세운 세 명 할머니의 목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인다. <밀양전>은 맨 얼굴의 치열함 대신 ‘일상’을 선택했다.

작품을 기록하고 제작한 박배일 감독은 자신이 본 밀양은 이런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의 싸움이 격렬하기는 하지만, 그런 시간이 24시간은 아니니까요. 제가 본 밀양은 아름답고 느릿한 무언가가 있는 곳이었어요. 내가 본 밀양의 싸움은 이런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 박배일 감독 ⓒ문양효숙 기자

‘영화의 만듦새를 위해 현장의 목소리가 묻혔다’는 비판도 있지만, 박 감독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이 왜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가’라는 질문에 그가 찾은 답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였기 때문이다.

“송전탑이 지어진 다음에는 절대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농사짓다 고개 들면 바로 눈앞에 송전탑이 있고, 마을 어귀에도 송전탑이 들어서게 되니까요. 물론 긴 싸움을 하시면서 핵발전소나 정부사업에 관한 의식이 생기기도 하셨죠. 하지만 근원은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송전탑 싸움 끝나면 소고기 먹고 싶다’고 늘 말씀하시거든요.”

감독은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 문제를 논리적으로 파헤치고 반박하는 방법으로 관객을 설득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밀양전>은 송전탑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며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할머니는 자신이 한전 직원과 경찰들을 향해 욕을 한 일을 떠올리며 “내 입으로 죄를 짓는 거야. 내가 어쩌다 이래 됐노. 참 무섭다. 욕쟁이 할매가 되뿌렸다”며 슬퍼한다. 그런 할머니의 탄식 위로 카메라는 서울 도심 한복판을 비춘다. 밤늦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고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도시를. 공사현장 앞에서 쑥을 뜯는 할머니들의 정다운 대화 뒤로 송전탑 공사를 위해 자재를 실어 나르는 요란한 헬기 소리가 겹쳐진다.

작년 6월부터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한 박배일 감독은 올해 8월부터 밀양에 상주하면서 촬영을 하고 있다. 밀양에서의 두 번째 작품인 <밀양 아리랑>을 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11월까지 대부분의 영화제를 마무리하면 밀양에서 촬영에 전념할 계획이다. <밀양 아리랑>에서는 “싸움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싶다”고 했다.

“밀양에서 농사지으시는 분들을 중심으로 땅의 의미, 평생 일궈온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 사람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면 결국 시스템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삶을 보고 있으면 사회가 보이는, 제 다큐멘터리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항상 가지고 있죠.”

긴 호흡으로 제작하는 <밀양 아리랑>은 이제 시작이다. 서둘러 <밀양전>을 내놓은 것은 밀양의 이야기를 더 알리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감독은 “할머니들이 어떤 정황에 놓여 있고 지난 8년간 어떤 싸움을 했는지,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처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밀양전(密陽戰)은, 밀양전(密陽傳)이기도 하다. 할머니들이 전하는 밀양의 이야기인 것이다.

<밀양전>은 현재 인천독립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상영을 마쳤다. 공동체 상영과 감독과의 대화도 가능하다. (문의 / 오지필름 ozifilm@hanmail.net)


▲ 다큐멘터리 <밀양전>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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