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25]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9,22)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요한 10,38-39)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요한 11,47-50)

그리스도교회가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는 복음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사례를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감탄하고, 예수님께서 움직이시면 수천 명이 따라다니고, 예수님께서 행동하시면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보통의 유다인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메시아셨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파견하신 하느님의 그리스도셨다.

보통의 유다인들 만이 아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한 것은 보통 이하의 유다인들, 그러니까 나병 환자와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들처럼 몸으로, 마음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처럼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 부정한 여인이나 세리처럼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 한마디로 보통 이하(?)의 유다인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선생님으로, 그리스도로 환호하고 따랐다는 것이다.

▲ <카야파 앞의 그리스도> 세부, 두초, 1311년

그런데 유독 일부의 유다인들, 수석 사제와 바리사이들은 끊임없이 예수를 괴롭힌다. 그들은 예수님을 회당에서 내쫓으려 했고, 붙잡으려 했고, 그리고 마침내 죽이기로 작심하였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예수님께서 행동하실 때마다 트집을 잡았고, 올가미를 씌우려 했고, 음모를 꾸몄다. 그렇지만 복음에 따르면 ‘군중이 두려워서’, ‘군중이 그분을 예언자로 따르고 있어서’ 그들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본다.

트집을 잡고, 음모를 꾸미고, 내쫓고, 붙잡고, 그리고 죽인다는 것, 폭력의 정도가 점점 극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짓 증언을 해서라도, 군중을 동원해서라도, 다시 말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왜 내쫓으려 했고, 왜 붙잡아서 혼을 내려 했고, 왜 죽이려고 결심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분노하고 증오하고 살기(殺氣)를 품게 했을까?

요한 복음은 적나라하게 그 답을 내놓는다. 앞에서 카야파가 한 말, 곧 “여러분에게” 더 낫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니,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자기들에게 ‘더 나은 것’, 그것이 권력이든, 재물이든, 명성이든, 지위든, 이념이든, 하다못해 하느님이든, 그 ‘더 나은 것’을 독차지하려고 하는데, 사사건건 예수님이 장애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들에게 예수님은 제거해야 할 최대의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그 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한 “여러분”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본문은 수석 사제와 바리사이들로 구성된 ‘최고의회’의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런데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카야파는 “백성”과 “온 민족”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물론 최고의회 역시 “거룩한 곳”과 “민족”을 내세우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백성과 민족, 그리고 거룩한 곳을 내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여러분”에게 ‘좋은 것’ 때문이었다.

요한 복음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있다.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그분에게 환호하고 감탄하며 동행하는 사람들, 자유와 해방과 인간다움을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편에 있다면, 자기들에게 ‘더 나은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독차지하려는 이들, 곧 예수님을 추방하고 붙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 의해(로마와 협력해서) ‘국사범’으로 ‘십자가형’을 당한 것도, 다시 말해 ‘정치범’으로 사형을 당한 것도 바로 이 대립 때문일 것이리라.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살기를 느낄 정도다. ‘국가’와 ‘민족’과 ‘조국’을 내세워서, 그리고 ‘국법’을 내세워서 누군가를 추방하고 잡아가두고 죽이려 하는 모습이 앞의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일을 너무나 닮았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되지만, 그래도 백 번, 만 번 양보해서 그것이 ‘세상’에서만 벌어지는 모습이라면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될 수도 있다. 미완성의 역사, 불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거창한 핑계거리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일반명사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고유명사로서의 그리스도교회를 말하는 것이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앞에서 소개한 복음 말씀의 거의 완벽한 판박이라 할 수도 있기에 처참하다. 국가를 내세우고, 민족을 내세우고, 거룩한 곳을 내세우면서 누군가를 추방하고, 붙잡아 가두고, 척결하자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야겠다. 카야파가 말한 “여러분”은 오늘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카야파가 말한 “여러분”에게 ‘더 나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