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13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다. 18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19 그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마태오 20,17-19)

수난에 대한 첫째 예고(마태오 16,21-23), 둘째 예고(마태오 17,22-23)에 이어 마지막 셋째 예고가 오늘 등장한다. 마지막 예고는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이루어졌다. 세 번이나 같은 내용을 언급한다는 것은 충분히 실컷 알려준다는 뜻이다. 제자를 설득하는 일이 예수에게도 쉽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렇게 가르쳤어도 제자들은 결국 예수를 배신한다. 예루살렘(16,21), 사람의 아들(17,22), 넘겨짐(17,22)은 이미 언급되었다. 사흘 만에 부활되리라는 말은 세 예고에서 공통이다. 제자들의 놀람과 두려움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제자들이 예수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사형선고를 받을 것,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 조롱과 채찍질을 받을 것,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 등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마지막 예고에서 분명해진다. 언급 내용이 그 순서대로 마태오에 나타나진 않았다. 채찍질 장면이(27,26) 조롱(27,29)보다 먼저 나온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도 아니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에서 “그들은 그를 죽일 것입니다”(마르코 10,34)는 “십자가에 달릴 것”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자세히 말해진다.

제자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더불어 가는 순례길이다. 예수와 함께 스페인 산티아고(Santiago) 순례길을 한달간 같이 걷는다고 상상해보자. 넘겨진다는 신적 수동태(passiva divina) 동사가 두 번 반복되었다. 예수의 저항과 고난은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는 뜻이다. 18절에 언급된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원래 서로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대사제(지배층 성직자)와 율법학자(신학자)는 서로 무시하는 갈등 관계였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결정적인 순간에 잘 단합한다. 가톨릭 주교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신학자일 것이다. 신학자들은 흔히 주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입바른 소리하는 사람이 예뻐보일 리 없고,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사람이 곱게 보일 리 없겠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동방박사들의 아기 예수를 방문(마태오 2,4), 예수 일행의 예루살렘 입성(21,15)에서 언급된다.

예수 저항과 수난의 일정에서는 종교 지배층인 대사제와 정치경제의 지배층인 원로들이 중심 역할을 한다.(26,3.47; 27,1.3.12) 율법학자들은 예수 저항과 수난 현장에서 주변부 역할로 밀려난다. 그들은 스쳐 지나가듯 잠깐 언급될 뿐이다.(27,41; 26,57) 그러나 모든 유다교 지배층들이 예수를 반대하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종교 지배층과 정치경제의 지배층이 무엇 때문에 서로 결탁하는지 주목하자. 부자와 권력자를 멀리하는 종교지배층은 세상에 없다.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반대하고 식민지 로마에 협조하였다. 민족을 배신하고 우국지사를 식민지세력에게 밀고하는 사람들이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큰 죄를 자주 저지른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도 그런 사람은 종교인 중에도 있었다.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명동성당의 종을 일본군대에 헌납한 노기남 대주교가 한 사례다. 프랑스 같았으면 노기남 대주교는 해방 후 적어도 감옥행이다. 알릴 것은 알리고 감출 것은 감추는 것은 정직한 교회사(敎會史)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새로이 밝혀진 내용이 중요하다. 예수는 이방인 손에 넘겨질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 예수 죽음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오늘 단락은 분명히 보여준다. 만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 죽음에 최종 결정권이 있었다면 이방인이나 십자가는 언급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유다교 내부의 종교문제는 유다교 최고의회에서 판결할 권한이 있었고 그 집행은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것에 해당되지 않았다. 예수가 이방인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예수가 유다교 종교재판에 관계없는 정치범이라는 뜻이다. 정치범 재판은 오직 로마군대 법원에서 다루어졌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도 예수가 정치범임을 뜻한다. 십자가 처형은 오직 정치범에게만 해당되는 처벌이었다. 예수는 정치범으로서 로마군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고 로마군대에 의해 사형집행을 당했다. 예수 죽음의 최종 책임은 로마군대가 져야 한다.

예수 죽음에 대한 책임 논의에서 로마 살리기와 유다인 죽이기는 교회 안에서조차 지겹게 반복되고 있다. 그런 흐름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세력의 노력은 참으로 끈질기고 눈물겹다. 그런 노력에는 신학적 식견보다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가 더 자주 개입되기도 한다. 복음서 저자들부터 그에 동조한 면이 없지 않다. 어떻게든 빌라도의 죄를 줄여주려고 애쓰는 장면이 복음서에 등장한다. 예수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빌라도가 머뭇거리는 장면, 손 씻는 장면 등이 나온다. 그러나 그 모든 정황을 다 인용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빌라도가 손을 씻는다고 해서 사형선고를 내린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에 대한 사형 판결은 로마군사법원에서 이루어졌다. 사형 집행도 로마군대가 하였다. 유다교 지배층은 예수를 모함하고 밀고하고 체포해서 넘겨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행위를 모두 합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겨우 보조 역할을 한 것이다. 만일 로마군대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다면 예수를 간단히 석방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넘겨준 유다인들을 무고죄로 처벌하면 되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 죽음에 주범은 로마군대요 유다지배층은 도우미에 불과하다. 뒤집어 해석하면 안 된다.

예수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설득당한 제자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운명을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운 것이다.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뿐 아니라 예수도 자기 운명 앞에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잠 못 이루는 이여. 그대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무엇일까. 예수의 운명은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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