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인생사]


‘물론 지금까지도 충분히 내 멋대로 살아왔지만, 텔레비전에서는 총천연색 현란한 강요들이 넘실대고, 정치하는 견공들은 이름에 걸맞는 견음(犬音)을 남발하는 현실 속에서 사라는 대로 사고 배팅하라는 대로 하고 입으라는 대로 입고 먹으라는 대로 먹다가 거지꼴 난 어리숙한 백성 틈바구니 속, 이제 이 나라 만백성이 그 어리숙함을 질질 흘리며 낄낄대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나는 더욱더 내 멋대로 하자.’

‘그들이 집 한 채 사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나는 월세집을 얻어놓고 집들이를 하자. 그들이 존경과 부러움의 눈물이 짙게 묻어 있는 손가락을 들어 강남의 부자들을 손가락질 할 때, 나는 오천 원짜리 솜바지를 입고 양말 신은 채 샌들을 신고 압구정을 활보하자. 과메기가 텔레비전을 장식하면 생꽁치를 구워 먹고 전어 철이라고 떠들면 나는 전어회집을 찾아가 어째서 과메기를 내놓지 않냐고 악을 써보자. 다르자.. 다르게 살자. 무엇 하나라도 무리와 같지 않게... 그 어느 것이라도 남들과 같은 것이라면 마치 똥 냄새를 심하게 맡은 듯 표정을 찡그릴 일이다.’


뭐 이따위 돼먹지 않은 결심을 하고 난 다음날, 말하자면 성모님을 위한 축일, 다른 말로 하면 새해 첫날에 나는 11시 축일미사에 참례했다.(요즈음의 나는 새삼스럽게도 우리 색시를 많이 사랑하게 된 바 혼자 성당에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 여인의 뒤태가 몹시 안쓰러웠다.) 역시 미사는 지루했다. 물론 많은 이들이 미사를 통해서 영혼의 평안함과 은총을 경험하며 드물게는 경제적 축복도 그곳에서 받은 바 있다고들 하는 것을 잘 알지만 전술했듯이 나는 다르다. 나는 지루하다. 지루한데 왜 거기 앉아 있냐고? 그런 질문은 참으로 우문이다. 나는 귀가 닳도록,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의 의무’라는 얘기를 들어왔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내가 이 종교를 떠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자면 최소한의 의무는 준수해야 할 일이다. 물론 달갑지는 않다. 그런데...

지루함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모두를 하나로 만들려는 억지 강요는 정말 싫다. 미사 통상문을 외우고 함께 염송하는 것이야, 성수주일이 신자의 의무이듯 미사 참례하는 이의 의무일 것이다.(안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사실 나도 미사 중에 손을 잡고 주의 기도를 부르거나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에 목에 뭔가 치미는 벅찬 감동을 느끼곤 한다.) 허나 문제는 그 일련의 제의절차가 아닌 곳에서 꼭 불거지기 마련이다.

영성체가 끝나고 광고시간이 되자 우리 보좌 신부님께서 매우 자애로운 신년 덕담을 하시려고 그러셨는지 신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2008년의 경험을 발판으로 열심히 생활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뭐 좋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그 연두교서 막바지에 다음과 같은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나는 심히 당황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매일 새벽미사 때 하는 것처럼 구호를 외쳐 볼까요?”
“네”
“자 그럼 모두 오른 손을 드시고 외치시는 겁니다. 구호는 아자, 아자, 아멘, 파이팅입니다.”
“아자! 아자! 아멘! 파이팅!”

아니... 매일 새벽에 이 짓을 했다고?
성미가 불같았고 일방적으로 남의 눈에 있는 티끌만을 찾아 헤매던 젊은 시절, 나는 술자리에서, 노래를 못하는 것을 뻔히 아는 친구에게 “노래를 못하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노래를 불러가면서 억지로 노래를 시키는 분위기를 증오했다. 술이 많이 취하면 그런 자리에서는 술병을 깨거나 술판을 엎곤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같이 술 먹던 동지들이여. 용서해라.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엄청 다르다.)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바로 그때처럼 분노가 치미는 것을 억지로 참는데 색시가 가만히 내 손을 잡으며 “토마스. 우리 강복은 받고 나가자”고 했다. 그렇지. 나는 또 경솔하게 판단할 뻔했다. 이건 우리 젊고 착한 보좌신부님의 잘못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50이 다 된 나이에 또 추태를 부릴 뻔했다.

대개의 영업직 사원들은 아침마다 그런 구호를 외친다고 한다. 술자리에서는 언제나 뭔가를 외치며 잔을 부딪치고 사람들은 말끝마다 파이팅이라고 외친다. 사람들을 자기 의도대로 끌어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뭔가를 일률적으로 따라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터득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건 치사한 짓이다. 1980년대 초반에 전두환이라는 괴물이 써먹던 3S정책을 미친 듯이 비판했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그걸 따라하고 있으니 이게 말이 되냐 이 말이다. 그러면서 정확하게 박정희를 따라하는 이명박을 비판할 자격이 있냐 이 말이다.

매일 기뻐하고 언제나 기도하며 매사에 감사하라는 성경구절을 줄여 ‘기기감!’이라고 외치는 (그것도 마치 한나라당 전당대회처럼 결연하게) 곳에서 나는 봉사를 한다. 물론 나는 한 번도 그 구호를 외친 적이 없고 누가 그런 나의 태도를 문제 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 구호를 외치기가 싫습니다.”

예전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라는 곳에 다닌 일이 있다. 잘하면 목사님이 될 수도 있었던 그곳을 때려치운 이유는 단 하나다. 나는 엑스터시가 싫다.

사람들은 ‘부흥’을 원했고 그것은 교회의 발전(양적 팽창)을 보장했으며 고로 목사와 부흥사들은 ‘부흥사경회’라는 것을 자주 열었다. 여기서의 ‘사경’이 査經인지 沙耕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참가해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함과 눈물을 뿌려대며, 그야말로 사경을 헤매는지 똑똑히 볼 수 있고 바로 그 사경을 헤매던 신도들은, 희대의 부르주아 폭력단체 프리메이슨을 능가하는 집단주의 내지는 공범의식으로 똘똘 뭉쳐 결국 지금 이 순간 온 국민으로 하여금 사경을 헤매게 만들었다.

부피가 작다고 패덕이 윤리로 변할 수는 없다. 그 어느 것이라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성과 자유 의지를 훼손하는 것이라면 결연히 거부해야 할 일이다. 허나 슬프게도. 아주 많은 부분, 우리 교회는 반이성적 퍼포먼스에 근거하여 움직이는 모양이다.

 

변영국/ 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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