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12

1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습니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3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 4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5 그들도 일하러 갔습니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6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습니다. 7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8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습니다. 9 오후 다섯시 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10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12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입니다.“(마태오 20,1-16)

저항의 땅인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직전 예수는 제자교육을 더 엄하게 시킨다.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마태오 19,30)는 말씀이 바로 앞 단락에 나온다. 오늘 단락에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마태오 20,16)이라고 그 가리키는 순서가 바뀌었다. 첫째가 꼴찌 될 것이라고 단정하듯 말하는 오늘 본문은 더 강력한 경고다. 첫째라고 자부하며 사는 사람들(주교와 대형교회 목사들)은 오늘 구절이 얼마나 두려울까. 천국행 입장권을 받은 것처럼 행세하는 성직자나 신자들도 심각히 새길 말씀이다. 경거망동하지 말라.

갈릴래아 지방의 토지 소유자들은 날품팔이 일꾼이 필요했다. 부자들에게 정규직 노동자인 종보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날품팔이는 인건비가 적게 들고 여러모로 유리했다. 당시 날품팔이 인구는 많았던 것 같다. 노동시간은 해 뜰 무렵부터 해질녘까지다. 1데나리온의 일당으로 작은 빵 10-12개를 살 수 있다. 3~4데나리온으로 12리터 밀가루 또는 양 한 마리를, 30데나리온으로 종이 입는 옷 하나를 살 수 있다. 소 한 마리 가격은 100데나리온이다. 연간 최저 임금은 200데나리온이었다. 당시 샴마이 학파와 함께 바리사이파의 양대 학파중 하나인 힐렐 학파를 이끌던 유명한 랍비 힐렐(Hillel)은 하루 1/2 데나리온 받고 일하던 날품팔이였다. 우리 시대 신학자는 어떻게 사는가. 돈, 권력, 명예에서 ‘갑’의 지위에 있는 ‘탁상머리 신학자’가 대부분 아닌가. 그런 환경에서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을 교묘히 방해하는 어용 신학자가 나오기 쉽다.

오늘 단락에서 노동과 실업문제에 대한 예수의 관심이 드러난다. 6절에서 오후 다섯 시에 할 일 없이 서성거리는 사람들은 당시 심각하던 실업률을 암시하고 있다. 아르고스(argos)는 (할 일 없는) 실업 또는 게으름을 뜻한다. 게으른 사람을 나무라는 뜻으로 6절을 해설한 예레미아스(Jeremias) 의견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실업자들에게 예수가 먼저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 시대 성직자들은 실업자들과 자주 대화하는가.

오늘 단락은 믿음으로만 구원된다는 바울의 주장과 아주 가까운 것으로 흔히 해석되어 개신교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쥘리허(Juelicher), 보른캄(Bornkamm), 예레미아스(Jeremias), 융엘(Juengel) 등 쟁쟁한 개신교 학자들은 오늘 단락을 ‘복음의 핵심’(Evangelium in nuce)이라 주장한다. 반면 가톨릭은 “여기 있는 형제자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최후심판 이야기를(마태오 25,31-46) 마태오복음의 핵심으로 본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오늘 단락은 주로 비유적으로 해설되었다. 루터(Luther)는 신부와 수도자를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으로, 가장 늦게 일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해설하였다. 그 후 개신교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을 행업으로 구원을 노리는 사람, 마지막에 일하러 온 사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으로 대비시켰다. 아담에서 예수 이전까지 유다인을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 예수 이후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을 마지막에 일한 사람으로 여기는 반(反)유다적 해설도 있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일한 사람을 유다인, 정오에서 오후까지 일한 사람을 그리스도인, 오후에서 해질 무렵까지 일한 사람을 이슬람교도라고 보는 해설이 이슬람교 문헌에 있다. 모두 성서 본문의 뜻과 거리가 먼 해설이다. 성서를 제대로 모르는 신자들은 엉터리 설교에 놀아나기 쉽다.

오늘 단락이 믿음이냐 행업이냐를 따지는 단락인가. 그렇게 보기 어렵다.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인은 품삯을 주지 않았다. 일한 사람들은 모두 일당을 받았다. 주인은 일꾼들의 일한 시간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너그럽게 대우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너그러움이 강조되는 단락이지 일한 사람을 무시하는 단락이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는 단락이 전혀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촉구한다.

유다교에 대한 분리를 강조하고 이론화한 바울, 유다교와의 연결을 강조하는 마태오의 바탕이 서로 다르다.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하는 마태오와 ‘고백하는 믿음’을 강조한 바울. 누가 더 예수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있나. 오늘 그리스도교는 누구 입장을 더 강조해야 할까. 내 생각에 마태오를 더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마르코와 마태오가 바울보다 더 뛰어난 신학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단락의 뜻을 요약하자. 1.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에게 하느님은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시다. 2. 하늘나라를 위해 누구나 조금이라도 애써야 한다. 3. 하늘나라를 위해 조금이라도 애쓴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 똑같이 소중하다. 4. 하늘나라를 위해 애쓰는 사람은 서로 시기하면 안 된다.

하느님께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만큼 높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하느님께 아무 것도 바랄 수 없을 만큼 낮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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