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의 삶과 노래]소통과 쇄신

  

 

몇 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홍콩 한인성당에서 이틀간 초청강의를 마치고 나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중국 심천 한인성당으로 가게 되었다. 홍콩은 비자가 필요 없지만 중국은 아직도 비자가 필요하고 통과절차도 여전하다. 이런 기회가 자주 없기 때문에 이웃 도시인 광주와 진관에서도 먼 거리를 마다않고 신자들이 참석하여, 250석 규모의 꽤 큰 강당이 꽉 찼다. 예상보다 강의가 길어졌기에 이웃 도시의 신자들은 갈 길을 서둘렀고, 주최를 맡은 심천본당 공동체 가족들과 뒤풀이를 하게 되었다.

6년 만에 다시 만나 그간의 얘기를 주고받다가, 몇 달 전 부임하신 본당신부께서 다음에는 가족들과 함께 오라고 하셨다.
“저는 초청강의에 응할 때 가능하면 가족동반을 안 합니다. 신부님의 말씀만은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가족들과 함께할 경우 아무래도 초청한 쪽에 부담을 드리기 때문이지요. 그 대신 일정이 뜸한 방학 때를 이용해서 가족이 여행을 자주 합니다.”
“가족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는 것도 심적 부담이 되지요?”
“아니요. 저는 오히려 좋던데요. 서울 인근에서 강의가 있을 때 가끔씩 가족들이 함께할 때가 있는데요. 제가 나누는 내용들이 대부분 일상적인 것이어서, 가족들이 듣고 있으면 오히려 격려가 되더라구요. 잘 알고 있는 삶의 부분들이지만, 그렇게 강의로 들으면 새롭게 여겨져서 가족들도 참 좋다고 합니다.”

   

“아~. 그런데 저는 아니예요. 저희 부모님이 함께하시는 미사에서는 도저히 강론을 못 하겠더라니까요. 제가 처음 주임신부로 시골본당으로 갔을 때, 미사 후에 본당 간부들과 인사하는 자리였는데, 마침 부모님이 오셔서 인사를 시켜드렸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신 아버지께서 ‘우리 아들이 좀 어설픕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셔서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어요. 거기 모인 신자들께는 본당신부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몹시 난처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드리는 미사에 가능하면 못 오시게 합니다.”
“신부님. 참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누구에게나 내 자식은 소중하고 장해 보여서 오히려 과장되게 높이기 일쑤인데, 그런 겸손한 분이 계시다니요.”
“제가 아는 신부는 어느 본당에 부임하시면서 어머니가 식복사로 계셨기에 같이 가셨답니다. 부임하는 날 차에서 내리면서 본당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는데요. 신자들이 어머니께 좋은 아들 두셨다고 칭찬을 하고, 그런 좋은 신부님을 낳아주셔서 고맙다고 말씀드리니, ‘우리 아(애) 아무것도 모릅니데이’라고 손사래를 치셨다는 겁니다.”
“신부님. 그 어머님도 감동입니다. 두 분의 얘기를 듣다 보니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그토록 겸손하신 분들 덕으로 신부님들이 잘 사실 수 있겠어요.”

 

언젠가 전라도 섬으로 소공동체 강의를 하러 갔었다. 그 본당 출신인 신부와 함께 초대되어 강의를 나누어서 진행하였다. 강의 후에 그 신부 댁에서 함께 자기로 했는데, 칠순 노모께서 이불을 깔아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어머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김 신부. 아까 강의 잘 들었네. 근디 나는 그냥 살던 대로 살라네. 이 나이에 바꿀 수가 있겄능가.”
강의 내용은 참 좋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강의대로 살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진솔한 말씀이 내 가슴에 감동으로 전해왔다. 이부자리에 스민 따스함과 함께.

지난여름 캐나다에 갔을 때도 그런 감동을 만났다. 마침 한국에서 아들 신부에게 놀러 오신 부모님과 함께 사제관에서 식사하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나와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는 신부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 신부의 부친께서 엿장수였고 내 아버지는 오뎅장수였기에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힘들 때 서로를 의지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얘기를 듣던 어머님께서 아버님과 눈짓을 주고받으시더니 계면쩍은 얼굴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연탄장수였어요.”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아들이 성직자인데 그런 일을 굳이 밝힐 부모님이 얼마나 될까? 부모님들의 이런 겸손과 진솔함 때문에 아들은 좀 더 겸손한 성직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도시로 가 있는 내게 이메일이 왔는데 그 제목이 이러했다. ‘연탄장수 아들이 오뎅장수 아들 형님에게’라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성직자는 이런 부모님들의 사랑 속에서 자란 분들이면 좋겠다. 가르침이란 집어 넣어주기보다 끄집어 내어주기이다. 사람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수많은 좋은 것들을 끄집어 내어주려면 이런 겸손함과 진솔함을 일상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지난 대림절에도 스스로 동생을 자처한 신부를 만났다. 「낮아짐과 망가짐으로 세상에 오신 그분의 시선」이라는 강의를 들은 후 강복을 주러 나오신 본당신부께서 한 말씀 하셨다.
“오늘 대림피정 강의를 들으시도록 제 부모님과 누님 내외분을 초대하였습니다. 제 아버님께서 저렇게 웃으시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저도 강의를 너무 재미있게 잘 들었기에 감사드립니다. 아버님께서 가장 많이 웃으신 내용이 엿장수오뎅장수 그리고 연탄장수 아들 얘기였는데, 제 아버님은 개장수였습니다. 저는 물론 제 아버님께도 기쁨을 주는 강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두가 웃었지만 감동 또한 깊었다. 본당신부가 신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가지고 낮아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섯 살 위라고는 하지만, 평신도인 내게 바로 ‘형님’이라고 칭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내 자식이 성직자거나 수도자라면, 부모인 내가 먼저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야 다른 사람도 따라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내 자식을 극존중하는 모습이나 극존칭을 사용하는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된다. 내 자식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나쁘다 할 수 없기에,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게 받고 있는 쪽으로 눈길이 가게 된다. 그런 분들 중에는 공적인 자리에서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어느 본당에 초대되었을 때 겪은 일이다. 본당신부께서 피정 시작 전 인사말을 하면서 자신을 꼭 ‘신부님’이라고 지칭하셨다. ‘여러분이 그러시면 신부님은 무척 마음이 아파요’라고. 이 경우 ‘저는’이라고 해야 할 텐데도 스스로를 계속 ‘신부님’이라고 말할 때, 듣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이런 일은 드물지 않게 만나는 일이다. 스스로를 낮출 때 오히려 높아진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모른다고 보기 어렵다. 일상처럼 높임만을 받을 경우 낮아짐을 망각하기 쉽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보여 진다. 그중에서도 형제나 부모 혹은 친구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성직자가 겸손한 성직자라면, 그분들이 겸손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내 가족인 성직자나 수도자가 평신도들에게 함부로 대한다고 여겨졌을 때는 따끔하게 충고를 하거나 바로잡아 주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위상에 있는 평신도들을 존중하고 섬기는 마음을 갖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것은 소명과 같은 것이다. 신부라는 호칭 안에 이미 존경의 의미가 담겨있는데도 내 아들이나 동생에게 ‘신부님’이라고 깍듯이 대하는 것이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일인지 잘 숙고해 볼 일이다.

오랫동안 나와 형제애를 나누고 있는 후배신부의 얘기로는, 신부라는 사실 자체가 불효라고 한다. 결혼을 안 하고 살아서가 아니라, 부모들은 이미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신부들에 대한 수없이 많은 불평과 불만을 들어왔기에, 내 자식만큼은 그런 일을 겪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죽는 날까지 마음 편할 날이 없어서라고 한다. 대부분은 본당교우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라고 하니, 그렇다면 효도하는 길은 지극히 간단할 것 같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될 것이기에.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가?

그러므로 성직자 수도자들도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에게 진심어린 도움을 청해야 한다. 낮아짐과 망가짐으로 오신 그분의 시선을 따라 사는 그 길은 결코 혼자 힘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아끼는 후배가 서품받기 전에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형은 내 부탁을 꼭 들어줄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내가 신부가 되더라도 ‘신부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OO야’라고 불러줘.”
“착각도 가지가지라더니. 그럼 내가 너한테 ‘신부님’이라고 부를 것을 기대했다는 거야? 신경 꺼. 난 결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그가 서품 받은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도록 나는 그를 여전히 동생처럼 부르고 있다. 물론 우리끼리 있을 때의 얘기이고, 본당 교우들이나 다른 분들이 함께 있을 때는 보편적 예우를 해주는 것이 모두에게 편안하다. 내 주변에는 이런 동생신부와 형님신부들이 참 많다. 우리는 아무런 불편도 없이 형제애를 나누고 있고, 나의 열린 마음이 내 주변의 성직자들이 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소통은 늘 쌍방의 열린 마음과, 그 지향을 이루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이 따를 때 가능한 일이다. 평신도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성직자들에게만 덮어놓고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보다, 바람직한 소통을 위해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낮아짐과 망가짐으로 이 땅에 오신 그분의 시선을 따라 우리 모두가 낮아지고 망가지는 일에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진정한 사랑의 마음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줄 것이다. 

작은 새 깃털 속에 스며든 햇살처럼

따사로운 마음 모아 기도하는 님이여

모아 쥔 두 손 가득 담긴 소망은

식어버린 가슴마다 넘치는 사랑


가난한 마음 가득 순명과 희생 담아

영롱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님이여

흐르는 수단 자락 스민 소망은

비어있는 가슴마다 넘치는 은총

(윤여정 시/김정식 곡 「신부님의 기도」전문)


 

 

사진 고태환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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