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11

27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8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여러분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29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30 그러나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마태오 19,27-30)

대본인 마르코 10,28-31과 비교하면 오늘 본문에서 달라진 곳이 있다.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이 마태오에 추가되었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마르코 10,29)는 29절에서 “내 이름 때문에”로 바뀌었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배나 받을 것”(마르코 10,30)이라는 현세적 축복의 말은 마태오에서 사라졌다.

예수를 따르는 보상을 베드로는 묻는다. 숙식을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했던 제자들의 인간적 고충이 엿보이는 질문이다. 방랑 설교자들이 많던 초대 공동체의 사정이 짐작된다. 28절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 전체를 뜻하는 것이지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교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심판 날에 의로운 사람들(지혜서 3,8), 거룩한 사람들(70인역 신명기 7,22)이 참여할 것이라고 묵시문학에서 기대되었다. 에세느파의 쿰란 공동체에서도 그렇게 기대하였다. 그런 소망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이어졌다.(고린토전서 6,2-; 묵시록 20,4) 오늘 본문에서 새로운 것은 전체 이스라엘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유다교 문헌에서 의로운 사람들이 악한 사람을 심판하리라는 기대는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심판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예수를 따름은 다가오는 사람의 아들의 영예에 참여하게 된다.

마르코처럼 집이 아니라 ‘집들’을 버린 사람들, 즉 집을 여러 채 소유한 부자 제자들이 예수에게 있었다는 뜻일까. 현세에서 축복의 구절을(마르코 10,30) 마태오는 삭제했기 때문에 29절 ‘백배의 상’(사무엘하 24,3; 역대기상 21,3)은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는 단어인 것 같다. 하늘나라의 보상은 유다인이나 마태오에게 당연한 생각이었다.(마태오 5,12; 6,1-18; 20,1-16) 그러나 현세의 축복을 마태오는 기대하지 않았다. 29절 버린 목록에 아내와 남편은 빠져 있다. 이혼 금지 규정을 의식하여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선교활동에 아내를 데리고 다닌 베드로의 사례를 의식한 것 같다.(고린토전서 9,5) 또한 부모나 자식을 버려도 배우자는 끔찍이 아끼라는 말이기도 하겠다. 부모와 자식 인연을 천륜(天倫)으로 알지만 배우자는 그보다 아래 가치로 여기는 우리 문화와 크게 다르다. 배우자 인연도 천륜에 못지않다.

30절 말씀은 특히 종교인들에게 두려운 말씀이다. 종교인들은 하느님의 심판에서 특혜를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종교인으로 산다는 핑계로 온갖 호사를 누리는 현실에 대해 하느님에게 가혹한 추궁을 받을 것이다. 자기 구원을 아예 포기하고 체념하듯 살아가는 종교인들도 적지 않다. 종교인들도 자기 구원문제에 신경 써야 한다.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앞 단락에서 예수는 부자 청년에게 재산포기를 요구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하늘나라의 상만 언급하였다. 오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상으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많은 신자들은 현세에서 상을 받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것은 잘못된 야심일 뿐이다. 특히 성인으로 세례 받은 사람 중에 그 의도가 불순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품위세탁’을 하기에 교회와 성당처럼 좋은 모임은 현실적으로 보기 힘들다. 한 주일에 한 번 점잖게 대접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임금 체불한 악덕 기업주가 헌금을 제법 하면 금방 좋은 분으로 칭송된다. 부자를 환영하지 않는 종교는 세상에 없다. 부자를 극진히 대접하지 않는 종교인은 거의 없다. 부자 신자는 교회와 성당에서 곧 괜찮은 직책을 맡게 된다.

한국처럼 각종 선거가 잦은 나라에서 그리스도교는 정치 활동의 좋은 근거지다. 수백표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는 선거에서 대형 교회와 큰 성당은 정치인에게 거절하기 어려운 무대다. 취직, 승진, 서업. 인맥 관리에서 교회와 성당은 유리한 자리를 제공한다. 교회도 부자를 이용하지만 부자도 교회를 이용한다. 성당이 정치인을 이용하지만 정치인도 성당을 이용한다. 그러다보니 바른 말 옳은 말을 하는 종교인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부적절한 처신을 하는 종교인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

부자와 자주 접촉했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종교인은 보기 어렵다. 가난한 사람과 자주 접촉했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종교인은 적지 않다. 고급차를 굴리고 골프장에 들락거리는 종교인이 처벌받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가난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종교인은 금방 의심의 대상이 되고 처벌받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종교인은 성인 대접을 받지만 가난의 원인을 없애자는 종교인은 맑스주의자로 몰린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슬픈 현실이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저항과 죽음의 길목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현세적 보상을 약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요구하였다. 대형교회 목사들과 가톨릭 주교들이 우리 사회 개혁의 선구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최루탄 냄새를 평생 한번이라도 맡아 본 적은 있을까. 어두운 한국사회에서 그들이 희생을 각오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꿎은 신부들만 거리로 나서게 하지 말고 주교들이 먼저 나서면 얼마나 좋을까. 주교관에 갇혀 있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나오라. 부자나 권력자들만 주로 만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자주 먼저 만나라. 주교들은 대체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주교는 희생의 맨 앞자리에 서야 할 사람 아닌가.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직접 찾아다니지 않았는가. 예수는 희생의 선두에 서지 않았는가. 십자가에서 모두 도망친 제자들을 주교들은 따르려 하는가.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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