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 4]

베이징에 있는 중국 가톨릭 전국 신학교에서 일주일 남짓 지냈다. 학년별로 떼제의 기도 방식과 젊은이 사목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신학생들과 매일 함께 기도했다. 한 달 전에 베이징에 갔을 때는 옌징 신학교(개신교)를 방문해서 전교생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중국 개신교회에는 아직 떼제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말로 떼제공동체와 떼제의 노래를 소개하면 일부 어휘 때문에 “떼제는 천주교가 아니냐?”라며 조금 경계하는 시선이 있기도 하다.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개신교를 5대 종교로 부르는 중국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을 다른 종교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의 역사를 모르는 일반인은 물론 신자들에게도 같은 그리스도교라는 인식이 부족하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하느님 칭호에서부터 각각 ‘텐주(天主)’와 ‘샹띠(上帝)’로 달리 쓰고―이제는 개신교에서 대다수가 ‘션(神)’이라고 쓰는 추세다― 성경 번역과 인명 표기, 신앙 용어가 다른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중국에서 기도하거나 말을 할 때는 장소와 상대에 따라 용어 선정에 주의를 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중국만큼은 아니더라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용어가 다소 차이가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가톨릭 신자들은 ‘천주님’이라고만 불렀다. 가톨릭에서 ‘하느님’이라고 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라고 기억한다. 공동번역 성서가 출간된 무렵이었지 않나 싶다. 200년 가까이 쓰던 칭호 ‘천주’를 ‘하느님’으로 바꾼 것은 교회 일치를 위해 큰 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제는 ‘천주님’ 하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하게 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공동번역 성서의 하느님 칭호가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이란 사실 때문에 성공회와 기독교장로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채택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 우리말의 모음 ‘아래 아’가 없어지면서 ‘아달’이 ‘아들’이 되고 ‘하날’이 ‘하늘’로 바뀌었으니 ‘아드님’이라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이라고 해야 맞다는 국어학적인 설명은 먹혀들지 않았다. “하나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 해야 옳다는 이들에게, 우리말은 수사 뒤에 존칭을 붙일 수 없고 하나님, 둘님, 셋님 하지 않는다고 얘기해도 소용없었다. 무엇보다 늘 읽던 성경의 용어와 어투, 늘 쓰던 말에 대한 애착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으리라. 많은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

언젠가 중국(대만과 홍콩)에서도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통으로 쓸 수 있는 하느님 칭호에 대해 논의가 있었고 학자들이 합의안을 만들었지만, 가톨릭 주교단이 ‘천주’ 칭호는 포기할 수 없다고 해서 무산되었다고 들었다. 한국의 대다수 개신교인들이 ‘하나님’을 양보할 수 없는 것도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하든, ‘하나님’이라고 하든, 기도를 들으시는 이는 같은 한 분이시다. 다른 교파의 신자들이 비록 번역은 달라도 같은 성서를 읽고, 똑같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같은 신경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는가? 그들 모두가 하느님(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다.” (사진 제공 / 떼제 공동체)

어쨌든 하느님과 하나님, 아주 약간의 발음과 표기 차이가 그리스도인들을 갈라놓기도 한다. 나는 국어학적, 신학적, 선교학적 이유로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고 개신교회에 가서도 굳이 ‘하느님’을 고집했다. 그런데 어떤 중견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서 설교 중에 몇 차례 ‘하느님’이라고 발음했다가 신자들에게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를 최근에 듣고 놀랐다. 맙소사! Oh, my God!

이러니 한국에서는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함께 기도하기가 쉽지 않고 흔치 않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중국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말하거나 글을 쓸 때 어휘 선정에 더 고심하고 개신교 형제, 자매들을 배려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떼제와 관련된 책이 대부분 가톨릭계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개신교 일부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떼제의 노래 가사나 소개하는 글에 사용된 일부 단어가 한국 개신교회에서 잘 쓰지 않는 말이라는 사실도 작용했을 것이다. 떼제의 노래책이 처음부터 개신교 출판사에서 나왔거나 ‘하나님’ 등 개신교식 용어를 썼다면 가톨릭 신자의 반응도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결국 올 가을에는 떼제의 기도책과 노래책을 개신교용으로 출판했다. 화해와 일치를 핵심적인 은사로 가진 떼제의 노래책이 개신교용으로 따로 나온 것은 한국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사목적인 견지에서 공동체의 허락을 받았다.

몇 해 전부터 한국에 올 때면 여러 신학교의 초청을 받는다. 한 가톨릭 신학교에서 월례 피정 강의를 한 다음날 개신교 신학교에서 특강을 한 경우도 있었다. 또 개신교 신학교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신학대학원에서 특강을 하고, 바로 이어서 상당히 보수적이라 소문난 신학대학원에서 채플을 인도하기도 했다. 진보적인 목사님들은 내가 그곳에서 특강과 채플을 했다고 하니 모두 깜짝 놀라는 반응이었다.

중국에서는 공식교회와 지하교회(미등록 교회)를 구별하지 않고 초대를 받으면 찾아간다. 한번은 공식교회와 지하교회로 나뉘어 상종하지 않고 엄청난 불신이 쌓인 교구에 가서 양쪽에서 다 기도와 피정을 이끈 적도 있다. 그럴 때면 교회 분열의 아픈 상처가 가슴을 찢어놓는다. 분열은 교파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을 방문할 때 주일이 되면,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다 찾아가려고 한다. 안내원들은 왜 양쪽에 다 가야 하느냐고 묻곤 한다. 아마 나처럼 같은 날 두 군데에 다 가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장충성당 관계자도 “우리 카톨릭교 신자가 왜 저쪽 예배에 갔느냐?”는 반응을 보인다. 내가 묻는다. “조선은 하나디요?” “그렇디요.” 나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도 하나입니다. 조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일하듯이 우리는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때마다 아쉽게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를 못하는 표정이다. 어쩌면 남쪽의 가톨릭이나 개신교회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가톨릭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우리 가톨릭’(nous autres catholiques)이라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가톨릭이 아니다”라고 설파했다. 진정한 가톨릭은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 개신교나 정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잊어버리거나 외면하면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하든, ‘하나님’이라고 하든, 기도를 들으시는 이는 같은 한 분이시다. 다른 교파의 신자들이 비록 번역은 달라도 같은 성서를 읽고, 똑같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같은 신경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는가? 그들 모두가 하느님(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다.

양팔을 벌려, 서로 만나지 않고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을 각각 왼손과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것은 십자가의 영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서로 만나지 않는 두 사람(집단)이 우리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연결된다.

화해를 위해서는 이런 역할이 필요하다. 분열된 사회와 교회에서 양쪽을 다 붙드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기도 하다. 때로는 우리 몸이 찢기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는 없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 아닌가?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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