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10

16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7 예수께서는 “왜 당신은 나에게 와서 선한 일에 대하여 묻습니까?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이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키십시오” 하고 대답하셨다. 18 그 젊은이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19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하는 계명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께서는 “당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당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십시오” 하셨다.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떠나 갔다.

2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24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마태오 19,16-26)

어떤 부자 청년과 예수의 만남(16-22), 그리고 재산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대본인 마르코 10,17-31을 마태오는 몇 군데 고쳤다. 19절에서 ‘이웃사랑’의 계명, 21절에서 ‘완전한 사람’을 마태오는 새로 덧붙였다. 예수가 청년을 기특하게 보았다는 마르코 10,21은 마태오에서 삭제되었다. 청년을 제자로 설득하는데 예수는 실패했으며 그 이유는 재산 때문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된 내용이다.

선(善)에 대한 유다인의 질문은 율법에 대한 질문과 같다. 토라 이외에 다른 선은 없으며 하느님의 뜻인 선은 무엇보다도 계명에 드러난다고 유다인들은 생각했다. 17절 예수의 답변에서 예수 자신도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라고 추측할 필요는 없다. 지켜야 할 계명으로 십계명 후반부가 인용되었다. 네아니스코스(neaniskos, 젊은이)는 30세 미만을 가리킨다. 유다 철학자 필로(Philo)에 따르면 21-28세는 네아니스코스(neaniskos), 그보다 아래는 메이라키온(meirakion), 그 이후는 아네르(aner)라는 단어가 적용되었다. 일부 젊은이들이 가족과 재산을 뒤로 하고 방랑선교자가 되던 초대 공동체 상황이 반영된 이야기 같다. 그리스도교가 적어도 초대 공동체 초기에는 젊은이들의 종교였다는 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타이센(Theissen)의 말이 떠오른다. 역사에서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교가 젊은이들의 종교이던 시절이다. 예수는 젊은 시절에 세상에 등장하지 않았으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진 않았다. 예수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설교는 아직도 한국에 흔하다.

그 젊은이는 계명을 제대로 지켰다고 보는 해설자도 있다. 그가 욕심은 있었지만 위선자는 아니며 예수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이다.(마르코 10,21) 나자렛복음 29장을 근거로 그 젊은이는 전형적인 유다인으로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루터(Luther)과 캘빈(Calvin)은 행업에 의해 구원을 노리는 사람으로 그 젊은이를 묘사했다.

21절 ‘완전한 사람’(teleios)과 연결하여 가톨릭에서 완덕(完德)이니 가난, 정결, 순명이니 하는 단어가 자주 거론된다. 그런 단어는 보통 개인 윤리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에서 완전함은 이웃사랑을 위해 재산을 포기하며 예수를 따름을 가리킨다. 마태오는 개인윤리를 넘어 강력한 사회윤리를 요구한다. 완덕은 가톨릭에서 흔히 성직자와 수도자 등 일부 사람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누구나 완전함에 초대된다. 완전을 개인윤리로 축소하거나 일부 사람들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23절에서 재산과 하느님나라는 반대된다는 예수의 사상이 등장한다. 세상의 부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성서구절이다. 마음속에서 이 구절을 삭제하고 사는 성직자와 신자들도 많을 것이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말처럼 교회는 바늘귀를 넓히고 낙타를 줄이기 위해 애써 왔다. 부자들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신학자들의 노력은 지금도 눈물겹게 계속된다. 그런 짓은 이른바 종교적 매매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재산포기 권고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에게는 완전히 따르거나 또는 전혀 따를 수 없는 요구다. 그는 마태오 19,21을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구절로 여겼다. 예수가 누구인지 베버(Weber)가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겠다. 칼 바르트(K. Barth)는 재산포기를 사랑의 행위로 이해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에서 마태오 19,21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말한다.

25절 제자들의 놀라는 반응은 오늘 우리 교회의 태도와 멀지 않다. 재산과 하느님은 물과 기름처럼 엇갈리는 사이지만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동반하는 사이로 그리스도교에서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설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를 팔아 자기 지갑을 채우는 종교 사기꾼들 말이다. 오늘 본문을 근거로 신자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자도 있다. 참 나쁜 사람들이다.

오늘 본문이 사실상 그리스도교에서 외면당하는 현실은 누구 탓인가. 교회가 갈수록 부자가 되어가는 모습은 누구 탓인가. 돈에 대한 교회의 욕심은 인류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중 하나다. 특히 성직자들이 정신차려야 한다. 돈에 대한 성직자들의 욕심을 신자들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재산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예수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교회가 가난하지 않은 현실이 예수 탓은 아니다. 가난에 대한 예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할지라도 그 책임은 모두 우리에게 있다. 탐욕을 비난하고 재산의 덧없음을 설교하기 전에 교회는 먼저 교회의 재산에 대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가난하지 못한 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다. 수도자 개인이 가난하게 산다고 해도 그 수도회가 부자면 그는 아직 가난하지 않다. 신부 개인이 검소하게 살아도 가톨릭교회가 부자면 그는 아직 가난하지 않다. 그리스도교에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많아서 걱정이다. 오늘 성서본문 앞에서 한국 천주교회 주교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은 회개하길 바란다.

그리스도교는 돈으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시작한 조직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보다 가난한 교회가 더 우선이고 더 중요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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