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수녀의 이콘 응시]

 

초기러시아미술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박물관. 모스코바

En Cristo
잠깐 눈을 감고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그려보자.
엉클어진 머리에 거친 수염, 낙타 털옷에 가죽 띠를 두르고 지팡이도 하나쯤 쥐고 맨발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외치는 자! 키도 컸으리라. 광야에서의 단식과 고행의 생활로 여위어도 곧은 자의 모습이 아니였을까.
때론 카리스마 있는 눈매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오심을 준비시키는 자로서의 위엄도 있었으리라.

이 이콘을 바라보면 처음의 상상과는 다르게 세례자 요한의 표정이 참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데에시스(왕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중앙으로 하여 우리가 보아서 왼쪽엔 성모님, 오른쪽으로 세례자 성 요한이 위치한다. 이어 양옆에 2 천사와 13사도 외 특별히 공경하는 성인들이 그려진다)의 한 부분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와 손이 중앙에 계시는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기도하는 자, 간구하는 자의 모습이다.

오로지 우리의 회개를 위해 세상의 외침으로 살다간 세례자 성 요한!
자신의 추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한 오롯한 마음 하나였던 그는 이인자(二人者)로서의 소명에 가장 충실한 자였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보다 자신이 낫다고 말하지 않은 그였으며 우리를 준비 시키며 그분이 오시기를 겸손되이 기다리는 그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세상이 최고를 원하고 일등이 되기 위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고 거짓이 난무하여 끌어내기를 일삼는 요즘의 세태를 향해 세례자 요한은 무엇이라 외칠까?

“회개하라!”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콘엔 요한 가까이에 있는 나무가 도끼에 찍혀 있기도 하다. 요한의 말대로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3:9)라고 강한 어조로 우리의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자! 다시 간구하는 자의 손을 바라보자.
각자가 마음에 담아둔 이콘에서 알겠지만 손(手)은 남, 여 구별이 없다. 성인(聖人)은 성(性)을 초월하기 때문이고 그들의 손은 기도하는 손이며 우리의 간구를 전달해 주는 손이기 때문이다. 단지 아기의 손은 약간 몽땅하고 어른은 길쭉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펼쳐진 손의 부드러운 선(線)에 우리의 소망과 죄와 회개가 다 올려져 있음이 보이지 않는가. 여성스러우면서도 강직함으로 우리를 위한 기도가 올려지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그의 손은 그리스도를 향해 있고 흠숭하듯 낮은 자의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을까?
난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세상 곳곳에는 아직도 그 외침이 있다고 확신한다. 멕시코의 떼완떼뻭 교구에 아르뚜로 주교라는 분이 계셨다. 지금은 은퇴하여 80이 넘은 연세에도 나름대로 산마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내가 있을 당시만 하여도 주교로서 열정을 가지고 방대한 일을 하시던 분이다.

늘 구멍 난 흰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나무 십자가 하나 목에 걸고는 산마을 어디든 서에 번쩍 동에 번쩍하셨다. 아침마다 직무실에는 도움을 청하려 모인 사람들로 매일 장사진을 이루어도 거절이라곤 없는 분이시다. 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는 사람은 다 태우고도 신나게 노래 부르며 구수한 농담까지 하면서 운전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분과 함께 같은 교구에서 일한 것이 참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제2의 로메로 주교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늘 바른 말을 하다 보니 적이 생기기 마련! 실제 저격을 받기도 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당했지만 정부에서 자기들은 무관하다는 증거로 붙여준 경호 경찰 2명이 오히려 추종자가 되기도 하였다.

미사를 할 때는 제대의 바닥이든 계단이든 주교의 무릎 위든 상관없이 늘 아이들이 가득 앉아 있고 짐승들까지 점잖게 한 자리 차지한다. 성찬의 전례 때는 복사가 치는 종소리와 함께 개들도 짖고(알고 짖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찬미하겠지!!)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고 함께 온 짐승까지 챙기시는 분이다. 데리고 다니는 비서도 없이 당신 가방에 제의도 둘둘 말아 그냥 집어 넣고는 붕붕 잘도 다니신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도 아르뚜로가 오면 있는 그대로 맞이하고 일하던 손으로 악수를 나누어도 기뻐하고, 즐겁게 이야기 나누다 듬성듬성 빠진 이로 함박 웃으면 강복을 주다가도 우스갯소리를 던져 또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그는 정말 유머 1번지였다.

그의 차는 때로는 구급차가 되기도 하고, 짐차가 되기도 하고, 택시가 되기도 하여 늘 그분과 함께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기죽지 않고 자기도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교회에 대한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다 보면 작은 시노드가 되기 일쑤였다.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면 거절이 없는 분이시라 남녀노소 상관없이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분이었다. 나에게도 늘 “루시, 나에게 ‘너’라는 호칭을 쓰지 않으면 친구 안 한다”시며 경어(敬語)를 쓴다고 은근히 눈을 홀기셨다. 만나면 “너 밥 먹었냐?” “어디가냐?” “가는 길에 나 시장에 내려 줄 수 있냐?” 식의 버릇없는(?) 대화가 가능한 그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와 함께 하는 이들, 약한 자에게 먼저 다가 가는 그들. 자신의 안위나 명예,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도움이 필요한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오늘의 세례자 요한이 아닐까.


임종숙/ 루시아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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