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09

13 그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자 14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시오.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15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오 19,13-15)

유일한 대본인 마르코 10,13-16을 마태오가 줄이고 고쳤다. 어린이를 안아주는 장면(마르코 10,13)은 마태오에서 삭제되었다. 제자들이 어린이를 나무라는 장면과 제자들에게 화를 내는 예수 모습도 마태오에서 보이지 않는다. 예수와 제자들의 품위에 흠집이 가지 않도록 마태오가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다. 첫 복음인 마르코가 소박하고 정직하다면 후대 복음으로 갈수록 세련된 편집 솜씨가 드러난다. 짧은 문장보다 긴 문장이, 간결한 표현보다 화려한 표현이어서 원문과 거리가 멀다.

13절 파이디아(paidia)는 파이데스(paides)와 달리 아주 어린 아이를 가리킨다. 아마 부모들이 예수에게 데려온 자녀들을 암시하는 것 같다. 힙포크라테스(Hippokrates)는 7살 아래의 아이를 파이디아(paidia)로 분류하였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동작은 공동성서(구약성서)의 여러 곳에 보인다. 희생제사에 쓰일 동물 위에(레위 1,4), 모세가 요수아에게(신명기 34,9), 부모가 자녀를 축복할 때(창세기 48,14-18) 머리에 손을 얹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수 시대에도 율법학자들이 제자들과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다. 자녀 축복은 집안에서 부모가 행하였고 제사에서는 사제들이 백성을 축복하였다. 유다 어린이들은 보통 5살 때 토라를 읽기 시작하고 10살 때 미쉬나(Mischna, 구전[口傳]율법)을 배우기 시작하며 13살부터 계명 준수를 요구받게 된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는 이유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당시 사회적으로 존재 의미가 없던 어린이와 여성들의 처지를 제자들이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마태오는 그저 예수의 반응에만 신경 쓰고 있다. 14절 예수의 말씀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이야기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어린이 뿐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을 14절은 분명히 언급한다.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작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 하늘나라의 우선적 손님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을 특별히 대우하는 예수의 태도에 혹시 불쾌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단락의 주제는 어린이처럼 작은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교회사에서는 이 이야기를 어린이 같은 사람에 대한 집중은 외면한 채 엉뚱하게도 어린이 세례와 연결시키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분열(종교개혁) 시대에 어린이 세례에 대한 근거로 자주 인용되었다. 루터(Luther)는 어린이 세례를 이 단락에 연결시켰고 가톨릭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부터 어린이 세례와 오늘 단락을 연결하는 논의는 점차 사라졌다. 초대교회에 어린이 세례가 있었다고 강력히 주장하던 두 성서학자 쿨만(Cullmann)과 예레미아스(Jeremias)도 그 입장을 완화시켰다. 이제 그런 주장을 펼치는 성서학자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초대교회에서 어린이 세례가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오늘 단락의 19,14과 사도행전 8,36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 단락의 내용은 어린이 축복이지 어린이 세례가 아니다. 고린토전서 7,14는 어린이 세례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 근거다. 성서신학이 교회 전통에 밀려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오늘 단락이 꼽힌다.

일단 자리 잡은 전통은 (성서에 근거가 있든 없든) 그리스도교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먼저 전통이 세워지고 나중에 성서적 근거를 찾아 헤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성서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전통의 자생력은 계속 유지된다. 가톨릭교회의 경우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오래 된 것은 무조건 옳은 것인가. 근거 없는 전통은 왜 고쳐지거나 사라지기 어려울까. 신앙의 선조들에 대한 예우 차원인가. 성서는 멀고 전통은 가까운가. 전통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위력을 떨치는 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고칠 것은 빨리 고치는 것이 상책이다.

성서와 전통이 대립하는 경우라면 성서학자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가. 마땅히 성서 편에 서야 하겠다. 근거 없는 전통에 대해 성서학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 자초지종을 정직하게 설명해야 하겠다. 성서학자는 성서를 변호하는 사람이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지 않을 때 신학자는 누구를 편들어야 하는가. 신학자는 무조건 교회를 편들어야 하는가. 신학자는 우선 가난한 사람을 편들어야 하겠다. 신학 정보를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정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용 신학자 되기 쉽다. 교회가 본분을 잊고 자기이익에 몰두할 때 신학자는 교회를 강력하게 비판해야 한다. 공동성서 시대의 예언자의 임무가 오늘은 신학자에게 맡겨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족] 예배와 미사에서 어린이들을 조용한 방에 격리시키지 말고 어린이다운 모습으로 참여하도록 배려하면 어떨까. 갓난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 같다. 정적이 감도는 장례식 분위기가 예배와 미사의 원칙은 아니지 않는가. 성인 신자들이 그 독점적 주인공은 아니지 않는가. 하느님 앞에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세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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