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생활의 도전 - 3] 수도자의 경계적 현존

지난 호의 결론에서 축성생활의 신비적 차원의 우선성을 강조했다. 축성생활의 신비는 세속으로부터 격리된 수도원 안에서의 관상기도에서만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육화하는 데서, 그것도 사회의 변두리에서―교종 프란치스코가 강조하는 표현으로는 “실존적 변두리”― 하느님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데서 실현된다. 이는 축성이라는 개념 자체에서 나오는 성경적 ‧ 신학적 결론이다.

수도생활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축성생활은 당연히 성경에 나오는 축성의 개념에 기초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축성”의 의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에서 축성은 주로 ‘객관적’ 의미로서 사람(왕, 예언자, 사제…), 공간(땅, 성전…), 사물(봉헌물, 성전의 기물, 사제의 복장…), 시간(안식일, 희년, 축제…)이 신적 예배를 위해 세속의 용도에서 ‘분리된다’.*

(* 축성의 이 분리 개념은 주로 사제 전승에 해당되며 야훼계 전승이나 예언 전승은 축성의 개념을 ‘분리’의 관점보다는 축성된 이가 백성과, 그리고 하느님과의 사이에 이루는 ‘친교’의 관점에서 제시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축성의 ‘객관적’ 의미를 뒷전에 두고, ‘주관적’ 의미를 발전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이 역사 안에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고 하느님 앞에 백성을 보여 주도록 선택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강조되는 축성의 특징들 중 하나는 세상에 하느님을 증언하고 자기 삶으로 하느님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임무요 역사 안에서의 예언적 현존이다. 곧 “신약성경에서 거룩함의 고유한 영역은 경신례적 요소가 아니라 예언적 요소이다. 성스러움은 사물이나 장소나 예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성령의 삶이 드러나는 것과 관련된다.”(H. Seeb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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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축성된 이의 원형(proto-type)

‘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의 ‘그리스도’는 축성의 의인화, 혹은 인격화된 축성으로서 자신 안에 참된 축성을 요약하고 농축하여 완성한다. 그분 안에서 축성의 모든 신학적 의미가 실현되며, 따라서 다른 모든 사람의 축성은 본질적으로 탁월하고 유일한 “축성된 자”(The Consecrated) 예수 그리스도께 준거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축성은 육화에서 파스카 사건까지, 낮춤과 비움을 통해 영광스럽게 되는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실현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이미 “예수, 축성되신 분”이라는 의미이다. 그분 자신이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서 61,1-2를 인용하면서 자신을 그렇게 정의한다(루카 4,16 이하). “주님의 영이 내 위에 계신다. 그래서 나를 축성하시고(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루카 4,18은 성령, 축성, 사명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보여 준다.

요르단 강의 세례에서 명백하게 표현된 성자의 축성은 수난과 죽음의 신비에서 절정에 달하여 완성된다. 이는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세례 장면(1,9-11)과 임종 장면(15,34-40) 사이의 연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두 장면의 상응 요소는 극히 명백하다.

(* 지면관계상 자세한 분석은 생략하지만, 하늘이 열리고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묘사한 동사 skízō를 통해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 다가가게 된 세상, 그리고 성령의 선물 등이 핵심적 요소이다.)

예수의 축성은 요르단 강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 골고타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세례 때에 성령이 예수 위에 내렸던 것과 똑같이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께서 육화를 통해 취하신 인간의 처지는 모든 피조물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자리가 된다. 예수께서 죽으시면서 성령을 내주시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십자가 아래서 새로운 역사가 탄생한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당신 힘의 원천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박탈당하는 극단적인 비움(벌거벗김)의 순간이 그분 사명의 정점이 된다. 치유나 구마, 죽은 자의 소생 등 신적 권능을 드러내는 순간이 아니라 아버지께조차 버림받은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소멸되는 순간이 바로 사명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기 때문이다.

경계성(境界性), 축성봉헌의 본질

최근의 신학자들은 소위 ‘경계성’(境界性, liminality)*을 축성봉헌 생활을 규정하는 요소로 본다. (* 라틴어에서 ‘문턱’, ‘경계’ 등의 의미를 가진 limin-, limen-에서 파생된 단어 liminality는 ‘임계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는 ‘시류를 거슬러가기’*와 연결된 개념으로 축성된 자는 곧 이른바 ‘경계인’, ‘주변인’이라는 의미로써 축성봉헌 생활을 중앙집권화하고 집중화하는 체제의 주변부, 곧 변두리에 머무는 하나의 탈중심적 삶으로 읽어내는 관점이다. (* 이 표현은 근래 교종 프란치스코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 강조하는 바이지만 전에는 주로 수도자들에게 요구되던 예언적 사명의 한 요소였다.)

“축성봉헌 생활은 그 은사적 기원에서부터 ‘경계성’의 상태로 특징지어진다. 경계성의 고유한 특징은 경계지대(변두리)의 상황에서, 그리고 사회 규범 밖에 자리한 삶의 형태로써 하느님 나라의 표시 혹은 상징이 되는 것이다. 또 교회 안에서 종말론적 의식, 곧 묵시록적 의식을 보존하는 것도 경계성의 고유한 특징이다. 축성봉헌 생활은 이 경계성의 상태에 충실한 정도에 따라 사명수행의 모든 과정에 그 은사적 정체성을 보장하게 될 것이다.” (J.C.R. García Paredes)

‘경계성’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점점 널리 퍼져 가는 인간학적 개념이다. 가르시아 파레데스(García Paredes)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상징적이면서 비판적이고 변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소수의 주변적 집단을 만들어내는데, 그들의 역할은 경계적인 것이다. 인간 문화에는 가장 높이 평가되는 가치들, 특히 종교적 가치들을 철저하고 완전하게 구현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래서 철저한 소수 집단이 주변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 이를 행하는데 사회는 그 가장 깊은 희망, 꿈, 열망을 이런 집단들에 투사하는 것이다.

“축성생활은 여러 종교들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소수 집단이 사회 전체 안에서 변화를 가져오는 역할의 가장 중요하고 진정한 표현이 되어 왔다. 축성생활은 대안적 가치기준을 제시하여 현 상태에 대한 비판이 되고, 사회에 영감을 불어넣는 모델이 된다. … 이러한 대안적 성격은 축성생활로 하여금 예언자적 본성을 지닌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가르시아 파레데스, <축성생활>, 70 참조)

축성생활의 이 경계적 성격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그 구체적인 표현을 사막, 변두리, 변경지대에서 발견한다.

“‘사막’이란 말로 의미하는 것은 수도자가 사실상 아무도 없는 곳에 머문다는 것으로, 이는 역사 안에서 병원, 학교, 혹은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보살핌 받지 못하는 본당에서의 수도자들의 현존으로 증명되었다. ‘변두리’로 가리키고자 하는 것은 수도자가 힘(권력, 세력)의 중심에 있지 않고 무력함이 있는 곳에 머문다는 것이다. ‘변경지대’로써 의미하는 것은 수도자가 필요한 상상력과 그리스도교적 창의력에 따라서 체험할 것이 더 많은 그곳에, 더 큰 위험이 있을 수 있는 곳에, 전체로 본 교회가 화석화되어 가는 무기력 상태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서, 혹은 죄를 더 강력히 고발하기 위해서 예언적 활동이 더 필요한 곳에 머문다는 것이다.” (소브리노, Resurecciòn de la verdadera Iglesia,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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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변두리”로…

교종 프란치스코가 착좌 후 5개월여 동안 교회 공동체를 향해 던진 메시지의 주요 주제들 중 하나를 “나가라! 변두리로, 실존적 변두리로 가라” 하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20일 아르헨티나 주교회의에 보낸 메시지에서는 교회를 영적 세속성과 닳아빠진 성직주의로 이끌어가는 자아도취를 치료하는 길은 “실존적 삶의 변두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5월 8일 세계 수녀 장상연합회(UISG) 총회에서는 수도적 가난은 “삶의 실존적 변두리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배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장상들에게 “인간 마음의 실존적 변두리를 끌어안으면서 권위를 행사하라”고 권한다. 여러 기회에 그가 실존적 변두리를 강조한 이유의 하나는 아마 삼위일체 대축일에 방문한 로마 변두리 본당에서 밝힌 대로 “중심보다는 변두리에서 현실이 더 잘 보입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변두리란 하느님을 우선시하는 수도생활의 신비적 차원이 실제로 구현되는 현장이다. 변두리로 간다는 것은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 극변으로 가는 용기를 요구한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변두리에 자리했고, 모든 수도회 설립자는 변두리로 옮겨가 거기서 시대를 읽었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냈다. 그들은 변두리에서 수도생활의 참 의미를 다시 발견하였고 그 의미에 전 생애를 바쳤던 것이다.

오늘 교회가, 수도생활이 투쟁해야 할 대상은 자기만족과 현실안주이다. 우리가 중심부에만, 우리 수도원의 안전지대에만 머물러 있다면 생명도, 미래도 없다. 익숙한 일상에 사로잡혀서 지금 하는 일을 타성적으로 계속하다가 끝날 것이다. 변두리의 경계성 안에 산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겟세마니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위한 선택을 하셨던 그리스도처럼 성부께 대한 순종을 사는 것이다. 복음의 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이루어지는 성부께 대한 순종은 변경지대에 머물게 해 주는 사도적 역동성의 원천이다.

수도적 축성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순종으로, 인간의 가장 정당한 소망까지도 비워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희생적 차원에 기초한 삶의 형태이다. 그렇게 완전히 비워지고 내놓아진 상태로써 축성된 자는 총체적이고 철저한 경계성의 상황에 투신하는 것이다.

결국, 수도자가 축성봉헌된 자라는 것은 일등급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변두리에, 가장자리에 사는 그리스도인임을 의미한다.
 

국춘심 수녀 (방그라시아)
성삼의 딸들 수녀회

<기사 제휴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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