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수도원 기행]

▲ 독일 라허 호수가에 자리하고 있는 마리아 라악 수도원 ⓒ이장규

올해가 전례헌장이 반포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라, 가톨릭교회 전례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독일의 마리아 라악 수도원(Abtei Maria Laach)을 방문했다. 한때 유럽 수도원들 중에 선두주자인지라 잔뜩 기대를 하고 갔건만 사흘쯤 머물고 나니 수도원을 탈출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수도원 건물과 도서관, 유명한 신학자들과 풍성한 전례를 기대하고 온 나를 기다린 것은 악명 높은 보이론 연합회의 소위 빡센 수도승 삶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

마리아 라악 수도원은 옛 서독의 수도 본(Bonn)과 유서 깊은 도시 코블렌츠(Koblenz) 중간에 위치해 있다. 유럽의 유서 깊은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은 대개 자급자족을 위한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으며 수도원을 둘러싸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기 마련인데, 마리아 라악 수도원은 조금 외진 느낌을 받았다.

수도원은 화산활동으로 생긴 라허 호수(Laacher See)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도원 문간에서 마주한 손님 담당 신부들이 다들 거친 재질의 수도복을 입고 머리에 검은 필레올루스(주교나 성직자들이 쓰는 반구 모양의 모자)를 쓰고서 맞이하는데, 처음부터 그동안 체험했던 우리 연합회 수도원의 삶과는 많이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나, 일주일 내내 수도원 곳곳을 안내해 주었던 시메온 수사의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특별한 음식이 나올 거야” 하는 말에 내심 기대하고 들어갔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먹은 건 고작 스프 한 그릇. 특별한 음식이 나온다고 해서 스프를 조금만 먹고 본식을 많이 먹어야지 했더니 그걸로 끝.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날은 아마 첫 금요일, 즉 월피정을 하는 날이었고, 특별히 고행을 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점심을 굶었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방문 첫날, 아빠스가 교구 회의에 참석하느라 수도원을 비워서 원장신부에게 인사를 갔더니, “아, 너희가 선교 베네딕도회?”라고 했다. 솔직히 맞는 말인데도 기분이 무지 나빴다. 그래서 있는 동안엔 너희들보다 더 빡세게 지내주마 하고 오기를 부리며 식사도 덜 하고 간식도 줄이고 했더니, 처음 사흘 동안은 정말 죽는 줄 알았다.

▲ 수도원 성당 정면 ⓒ이장규

옛 명성을 회복하려는 노력

도착한 날이 금요일이라 금세 주일이 돌아왔다. 주일 전례의 첫 느낌은 사실 실망 그 자체였다. 과거 전례개혁 운동을 이끌었으며 현재도 독일어권 전례위원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례분야의 선두주자답게 뭔가 깊이가 있을 줄 알았건만 ‘이건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라틴어로 바치는 시간전례를 고수하고 있었다. 문제는 1년 내내 같은 노래를 부르면 좀 잘 부를 법도 한데, 특히 성가대장 수사의 노래솜씨가 영 아니었다. 나중에 떠나기 하루 전날, 전례 때마다 꼬박꼬박 전례서 쪽수를 챙겨주던 수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자기들도 알고 있다고 했다. 수도원에는 성가대장이 없다고 했다. “아니, 왜?”라는 질문에, 성소 문제가 심각한 와중에 수도원에 들어온 20대 말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유기서원자 네 명 모두를 공부시키러 외부로 보냈기 때문이란다. 수도원에서 가장 젊은 층이 거의 50대 정도로 보이는 분들인데, 자기들이 이렇게 힘들고 전례 때도 체면이 안 서더라도 미래를 바라보며 일단 젊은이들을 키우기로 했다고 한다.

그 중에 한 수사가 원래 교회음악을 전공했으며 현재 잘츠부르크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오르간 제작 기술자였던 수사는 고가구 복원 기술을 배우고 있는 중인데, 돌아오면 수도원 가구공예사를 다시 살릴 계획이다. 다른 한 명은 정원사 교육을 받고 있는데 인근 벨기에나 프랑스, 심지어 네덜란드에서 수도원을 방문해서 꽃이나 화분을 사 가는 손님이 있다고 했다. 나머지 한 명은 무얼 공부하는지 듣지 못했지만, 아무튼 몇 년 후 젊은 네 명의 수사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수도원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를 공동체 모두가 벌써부터 기대하는 눈치다.

전력질주를 불사케 만드는 일과표

수도원 일과표가 조금 이상했다. 자연스러운 동선이나 생활 습관을 고려해서 합리적으로 짜면 좋을 텐데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빡빡하게 짜 놓았다. 예를 들어 주일 공동체 미사는 오전 9시에 하고, 점심을 12시에 먹고, 커피타임이 오후 2시부터 4시 반까지인데, 낮기도를 오후 2시 반에 바친다.

수사들의 숫자에 비해 공동체가 크다 보니 일인 삼사역은 기본으로 맡는다. 그러다보니 주일 말고는 따로 쉴 시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일마저 쉴 여유를 주지 않는 이 시간표에 딱히 불만은 없는 듯 보였다. 주일 오전에 미사를 마치고 농장 책임 수사와 라허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점심식사에 맞추어야 한다고 근 8킬로미터가 되는 거리를 한 시간 반 만에 주파했다. 날도 춥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 다시 라허 호수를 보겠나 싶어 따라나섰더니 설마 한 바퀴를 다 돌 줄이야. 게다가 설명까지 곁들여서. 나중에는 점심식사 시간에 맞추려고 전력질주를 불사해야 했다. 어쨌든 주일에는 다들 이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서, 오후에도 또 알뜰히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시메온 수사와 함께 수도원 뒤에 펼쳐진 산을 돌았다. 낮기도 마치고 잠깐 커피 마신 후 남은 그 짬에.

▲ 라허 호수 전경 ⓒ이장규

공부하는 가풍

시메온 수사도 그랬지만 다른 수사들도 대화 중에 상당히 어려운 단어를 자주 구사했다. 원래 이 지방 사람들의 말버릇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속담이나 옛 말들을 대화 중에 꾸준히 인용한다는 건, 아무래도 책을 많이 읽는다는 방증일 것이다. 수도원 안에 독일에서 손꼽히는 신학 도서관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마리아 라악 수도원은 나폴레옹이 교회를 파괴하던 시절, 특히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의 토지와 재산이 사유화되면서 교구로 넘어가서 유력한 어느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예수회의 소유가 되었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때 독일어권 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와 도서관이 지어졌다. 이 도서관 덕택에 일찍부터 전례와 수도승 신학 분야에 건실한 학풍이 형성되고 지금도 학자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다. 유명한 전례운동의 선구자, 오도 카젤(Odo Casel)을 비롯해 부르카르트 노인호이저(Burkhard Neunheuser), 그리고 넓은 안목으로 이들을 후원한 일데폰스 헤어베겐(Ildefons Herwegen) 아빠스들이 이 수도원에서 나왔다.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도 나중에는 노선을 달리했지만, 초기에는 오도 카젤과 함께 작업했다.

수도원을 구경시켜주느라 일주일 내내 붙어 다녔던 시메온 수사.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보여, 처음에는 이 수도원은 원래 이런 원숙한 분들이 손님을 안내해 주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유기서원자였다. 실례가 될 것 같아 자세히 사정을 물어보지는 못했다. 사실 유기서원자인지, 아니면 헌신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주일 오후에 함께 산에 오르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한국에는 유명한 신학자가 누구인지, 신학교에서는 어떤 신학자들의 사상을 배우는지를 내게 물었다. 한국 신학교에서는 신학자들의 사상이 아니라 교의나 교리 도식에 맞추어서 그 체계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더니, 그럼 어떤 신학자를 좋아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이 개인적으로는 맘에 든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반색을 하며 자기가 바젤(Basel)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발타살의 제자라고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괜스레 아는 척 늘어놓았다가는 큰 창피를 볼 뻔 했으니까.

▲ 신학도서관 서가 ⓒ이장규

처음 방문 계획을 잡을 때는 하루 이틀 정도면 충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머물렀지만 수도원을 제대로 돌아보질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돌아본 수도원 일터 가운데에는 이들의 자랑거리인 두 분 미술가 수사들의 작업장이 있고, 철공소, 비석공예소, 가구전시실, 최근 몇 년간 독일 전역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수도원 서점 및 성물방, 인근 국가에서도 찾아오는 수도원 정원과 꽃시장, 과수원과 농장, 호텔, 출판사와 인쇄소가 있다.

아쉬운 건 이제는 수사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어 상당한 부분의 경영을 포기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인 다역을 맡아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사는 수사들의 단순한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간다. 떠날 적에는 이렇게 사는 게 수도생활 정신에 맞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계속 지내라고 했으면 “살려주세요” 했을 것만도 같다.
 

이장규 신부 (아타나시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기사 제휴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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