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24] 로마 8,31-39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이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로마 8,35)

어쩌면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에 두 가지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우선 ‘애국심’을 들 수 있겠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사랑하는 ‘국가’가 무엇인가에 따라, 애국심이 자칫 국가를 절대시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 분야든, 경제 분야든, 현세 사물 질서 가운데 절대적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의 경우, 조선왕조였다가, 대한제국이었다가, 나라를 잃고 다시 일제 강점 시기의 조선총독부가 통치했고, 독립한 다음에 ‘대한민국’이 되었다. 국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영속적일 수 있으나, 그 국가를 드러내는 체제는 그렇게 변화해왔다.

절대적인 것은 그 속성상 변하지 않는다. 왕국에서는 왕권이 절대적이었겠지만, 민주공화국에서는 ‘민(民)’이 ‘주인’이며, 그래서 불완전하지만 민의 뜻, 곧 민의에 따라 국가의 행위가 결정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경우는 ‘공화국’이므로 국가의 행위는 ‘공화(共和)’를 지향해야 한다. 이를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함으로써 ‘공동선’을 실현하는 임무가 ‘정치공동체’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애국심이란 곧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편이면 ‘애국’이고, 내 편 아니면 ‘반국가’인가

인간의 존엄함을 귀하게 여기고 공동선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결국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인 ‘민’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당연히 수많은 길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을 귀하게 여기고 공동선을 실현하는 길이 어찌 한 가지 길만 있겠는가? 분야마다 그 실현의 방법이 다를 수 있으며, 시대에 따라서도 마찬가지다.

정치생활에서도 다양한 이념과 그 이념을 실현하려는 정치실험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원내각제도 있으며, 정당정치도 있지만 아직 왕정을 계속하는 나라도 있다. 한마디로 다양함이 존재한다. 이 다양함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으로서 불행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각양각색 십인십색이란 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 다양성은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조화를 꾀하는 노력이다. 이 노력은 당연히 국가의 몫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경우 이 ‘다양성’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즉 피아(彼我)의 구별만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보수’와 ‘진보’라고도 부르지만, 우리의 경우는 ‘애국’과 ‘반국가’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내 편이면 애국이고, 내 편이 아니면 반국가가 된다면, 국가가 인간의 존엄함을 보호하고 공동선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나와 남을 가르는 절대 ‘기준’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우리의 경우 이 ‘국가’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도 있고, 결합시킬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경제가 절대 기준으로 작용하면서,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교육도, 가정도, 사회생활 전 분야가 바로 경제의 위력 앞에 한없이 초라해진다.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 하나로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면 경제절대주의라 할 만하다.” 사진은 지난 3월 25일, 복기성 · 한상균 두 노동자가 농성 중이던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송전탑 아래서 봉헌한 쌍용차 문제 해결 촉구 미사 ⓒ정현진 기자

‘경제’의 위력 앞에 모든 것이 초라해지는 현실

다음으로 ‘경제’를 들 수 있다. 경제생활은 인간과 사회생활에서 필수적이다. 경제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경제생활은 인간의 자기완성을 위해서도,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경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삼음으로써 사람을 경제의 노예로, 사회를 경제의 수단으로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 하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평범하고 상식적인 일상의 언어가 공허해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보다 돈이 더 앞서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경제제도 역시 정치생활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일 수 없다. 시대에 따라 변하고, 지역에 따라 다른 제도가 존재한다. 경제도 정치생활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공동선 실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특히 경제생활에 대해 일관되게 가르치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다. 하나는 ‘어떤 경우라도 자본은 노동을 앞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은 생산에 필요한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노동은 인간의 행위로서 인간에게서 직접 나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노동의 존엄’과 결합된다.

다른 하나는 ‘재화의 보편목적(모든 재화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므로)’이 ‘사유재산권(처분권을 포함해서)’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이는 ‘공동선’과 결합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노동과 자본이 대립하고, 재화의 보편목적이 사유재산권과 대립한다. 대립한다는 말은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편을 가른다는 뜻이다. 경제가 인간의 존엄함을 보호하고 공동선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나와 남을 가르는 절대 ‘기준’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경제가 절대 기준으로 작용하면서,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교육도, 가정도, 사회생활 전 분야가 바로 경제의 위력 앞에 한없이 초라해진다.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 하나로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면 경제절대주의라 할 만하다. 우리의 경우 이 경제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도 있고, 결합시킬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애국심’을 내세운 권력과 ‘경제’를 내세운 금력이 결합하고, 그리고 지식사회와 언론, 그리고 종교가 그에 부역하게 되면 인간의 존엄함, 특히 힘없고 약한 사람의 존엄함은 훼손되기 십상이고, ‘공동선’은 구호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고 떼어놓으려 한다.

“우상 숭배는 신앙에 끊임없는 유혹이 된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것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잡신이나 마귀, 권력, 쾌락, 인종, 조상, 국가, 재물 등 인간이 하느님 대신에 어떤 피조물을 숭배하고 공경한다면 이는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113항)

왜곡된 국가주의와 경제지상주의는 신앙인에게 끊임없는 유혹이 되며, 제1계명을 어기는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