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07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십시오.”

23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습니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습니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습니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습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절하며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습니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습니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습니다. 35 여러분이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마태 18,21-35)

앞 단락처럼 ‘죄지은 형제’가 주제다. 오늘의 단락은 ‘내게’ 죄지은 형제에 대한 용서를 다룬다.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용서의 한계를 토론한다. 예수와의 대화에서 용서의 양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용서의 질이 검토된다. ‘용서하다(apienai)’라는 동사가 21절과 35절에서 전체 단락을 앞뒤로 감싸고 있다. 왕이 주인공 같지만 실제 주인공은 무자비한 종이다. 루터는 32절에서 ‘악한 종’이라고 번역하였다.

베드로의 질문은 죄지은 형제를 이미 용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베드로가 제안한 “일곱 번”은 작은 숫자가 아니다. 일곱은 완성된 수이니 충분히 용서하면 되겠느냐는 질문이다. 예수의 답변은 더 놀랍다. 77번 또는 7×70으로 번역될 수 있는 숫자를 예수는 제시한다. 22절은 “카인을 해친 사람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일곱 번 보복 받으리라”(창세 4,24)를 연상케 한다. 거기서도 숫자는 불투명한데, 히브리어에는 숫자를 나타내는 부사가 없는 탓이다.

▲ <사도들에게 설교하는 그리스도>, 두초, 1311년

조건 없는 용서, 반복되는 용서는 오히려 악한 마음과 보복심을 용서받는 사람에게 키워줄 수 있다. 가톨릭 전통은 화해성사(고해성사)에서 당사자의 책임 있는 모습을 요구한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뉘우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칼빈도 언제나 용서하면 피해를 줄 뿐이라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작품 <부활>에서 마태오 복음서 8,21-을 핵심 주제로 삼았다. 법의 영역에서 한계 없는 용서가 유일한 진정한 태도라고 그는 말한다. 개신교나 가톨릭 전통보다 톨스토이의 태도가 마태오 복음서 본문에 더 가깝다.

23절에서 셈하려는 왕은 심판하는 하느님을 떠올리게 한다. 행동하는 순간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심판을 시작한 셈이다. 범인이 죄짓는 순간 판결은 시작되는 것이다. 재판관은 이 범죄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그리스도교는 타력 구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언행을 통해 구원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자력 구원을 강조한다. 범죄하고도 하느님께 매달리는 모습도 우습지만, 범죄하고도 혹시나 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모습도 어이없다.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어떻게 될지 누구나 거의 알고 있다.

채무자를 노예로 파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 법률에서 허용되었다. 탈출기 22,2는 도둑질한 사람만 노예로 팔릴 수 있다고 말한다. 탈무드와 미쉬나에서 자신과 자녀들을 파는 사례가 보인다. 채무 문제로 여인을 파는 것을 유다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남편이 노예로 팔릴 때 그 아내와 가족의 삶은 어찌 될까. 빚을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만 감옥에 있다. 오늘날 부자들은 보석금으로 감옥을 합법적으로 빠져나온다. 법도 주로 권력자와 부자에게 유리하다.

오늘의 단락은 이방인 궁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예수는 이방인 궁전의 상황을 어찌 알았을까. 24절 일만 달란트는 상상하기 어려운 액수다. 1달란트는 6,000에서 10,0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 무자비한 종이 탕감 받은 만 달란트는 그가 다그친 동료 종의 빚 100데나리온의 최소 60만 배 금액이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일당인데 우리 돈으로 5만 원이라 가정해보자. 무자비한 종의 동료는 500만 원을 빚졌고 무자비한 종은 300억 원의 부채를 지고 있다. 300억 원 빚을 탕감 받은 종이 500만 원을 빚진 동료를 다그치는 장면이다.

하느님께 빚진 것을 일만 달란트로, 동료 인간에게 빚진 것을 100데나리온으로 비유하는 해설자들이 많았다. 그런 해설은 오늘의 단락과 거리가 멀다. 동료 인간에 대한 자비 없이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좋은 관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오늘 단락의 가르침이다. 하느님께 신경 쓰는 것 대부분을 인간에게 신경 쓰는 것으로 돌려도 된다. 인간에게 차갑고 하느님께 잘하는 경우는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하느님의 자비는 무자비한 인간에게서 회수될 수 있을까. 중세 교회부터 그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감사하지 않으면(ratione ingratitudinis) 예전에 용서받은 죄가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무자비함으로 흐려질 수 있음을 마태오는 오늘의 단락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한 번도 비판한 적이 없다고 내 스승 소브리노는 강조했다. 혹시 그 유일한 예외가 오늘의 단락은 아닐까. 가난한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고 너그럽게 지내라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이 서로 분열하기를 부자들은 언제나 노린다.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는 정치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도 큰 주제다. 해방신학에서 오늘의 단락은 외채 문제로 고통 받는 제3세계 가난한 나라들과 연관되어 설명된다. 원금 회수는 물론이고 원금보다 훨씬 많은 이자를 받아먹는 선진국의 무자비한 행태 말이다.

하느님께 과분한 사랑을 받는 성직자들이 종교 정보에 어두운 신도들을 윽박지르는 모습이 오늘의 무자비한 종에게서 연상된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이웃 종교를 윽박지르는 모습이 무자비한 종에서 또한 연상된다. 자비롭지 못하면 아직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