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호 <평화신문>과 2629호 <가톨릭신문>

두 신문이 같은 시점에 나왔지만 의미를 달리하여 <평화신문>은 1000호 특집으로 12월 28일자이고, <가톨릭신문>은 신년호로 1월 1일자로 발간되었다. 의미는 달랐지만 두 신문 모두 각각의 의미를 살려 다양한 꼭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는 표현과 말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 동의 할 수 없는 표현

<평화신문>은 지령 1000호 발간을 맞은 특집기사 중 14면에 ‘평화신문에 비친 교회와 세상’을 배치하였다. 기사내용은 지난 1000호를 쌓아온 기사를 창간호부터 100호 단위로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기사의 부제였던 ‘세상 불의엔 당당히 맞서고, 어려운 이웃은 따뜻이 보듬고’란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표현의 주체가 교회인지, <평화신문>인지는 기사 내내 헷갈렸다. 기사를 자세히 보자.

창간호는 김수환추기경과 대담이었고, 100호는 이해인수녀의 오빠인 이인구 교수의 기고와 순교자 후손 탐방, 200호는 평화방송 지방국 확충 관련, 300호는 전국가정대회와 낙태관련법안 개정 촉구, 400호는 프랑스선교사 임경명신부이야기, 500호는 선교관련 주교회의 정기총회, 600호는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 700호는 김수환추기경 칠레 대십자훈장 수상, 800호는 인권주일관련, 900호는 집중호우 입은 피해가정에 대한 독자들의 도움과 함께 <평화신문>이 2001년부터 해온 사랑 나눔 캠페인으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아마도 ‘세상불의엔 당당히 맞서고’는 창간호와 관련이 있으며, ‘어려운 이웃은 따뜻이 보듬고’는 900호와 관련지어 부제로 뽑은 것으로 생각이 든다. 조금 ?자세히 들어가 보자. <평화신문>이 인용한 창간호(1988년 5월 15일자)와 관련된 기사를 그대로 인용한다. “1면 머릿기사는 [광주 비극, '솔로몬 지혜'로 풀어야]라는 제목의 김수환 추기경 대담 내용입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민주화 욕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제는 그만]이라는 제목이 달린 사진도 눈길을 끕니다. 검은 방독면을 쓴 시위현장의 전경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인데, 마치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외계인같습니다. 광주의 상처는 20년이 아니라 200년이 흘러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나마 진상 규명과 피해자 보상이 어느 정도 이뤄져 다행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화염병과 최루탄이 자취를 감추고, 방독면 외계인(?)도 지구를 떠났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평화신문>과 현재의 <평화신문>이 제호는 같지만 지향점이 같은지는 교계언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고개를 젓는다. 왜일까? 기자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사라졌다고 했지만 이제는 촛불에 물대포를 쏘는 시국에 대한 교계신문의 외면과 교회지도자들의 침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가난은 나랏님도 못 없앤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 가난을 만드는 구조악에 대해, 그런 ‘어려운 이웃은 따뜻이 보듬고’라는 마음으로 현재의 가장 어려운 이웃중의 하나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교계신문의 반응은 어떠했었나? 관련단체의 동정이나 성명서가 아닌 신문사가 자진해서 시대의 천형을 겪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취재가 있었는지 검색하여 보라. 강남성모병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신문사로서는 좋은 날을 맞아 이런저런 과시용 보도를 하고 싶겠지만 슬며시 발 들여놓는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다.

‣ 동의 할 수 없는 말

그런가하면 <가톨릭신문>은 신년호 특집으로 편성한 꼭지 중 8~9면에 정진석 추기경과의 대담을 실었다.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유일한 현역 추기경으로서 언제나 그의 메시지는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기자는 여러 질문과 함께 북한과 관련한 단 한 개의 질문을 물었다. 오해를 없애기 위하여 관련 질문과 대답의 전문을 옮긴다.

(질문) 최근 경제난으로 북한을 돕는 시민·사회·종교 단체들의 움직임이 위축될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아직도 식량 및 자원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북한 동포 돕기 운동과 통일 사목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의 인간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관계의 기본은 인격존중입니다. 인격존중이 기초되지 않는 인간관계는 허구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인격자와 인격자와의 관계이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부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존하려면 상호간의 인격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소외된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숙자에게 식사를 제공할 때도 인격을 존중하는 바탕 속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래야 노숙자들의 인격이 손상당하지 않습니다. 청주교구장 재직 시절, 교구내 한 자선 단체가 무료급식을 실시한다는 말에, 노숙자들에게 밥을 무료로 주지 말고 100원씩 돈을 받으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숙자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세로 가진 것을 던지듯 주면 안됩니다. 존중하면서 나눠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주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받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입니다. 물론 주는 사람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받는 사람에게도 문제는 있을 수 있습니다. 짝사랑은 ‘관계’가 아닙니다. 일방적인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위해선 상호가 서로 움직여 작용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해 준다는 것은 선의(善意)를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기자가 간결하게 물은 ‘북한동포돕기’와 ‘통일사목’에 대한 추기경의 대답은 필자로서는 도저히 해독이 안된다. 더욱이 정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임과 동시에 평양교구장을 맡고 있다. 그러나 답변은 평양교구장임을 의심케 하는 여유로운(?) 말이다. 노숙자와 관련한 언급은 인격에 관한 것이었지만 적절한 비유는 아니었다. 더욱이 상호인정이 통일사목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필자의 무지함이 크지만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가톨릭신문>은 2008년 11월 1일에 작은형제회가 평양에 개원한 무료급식소인 ‘평화봉사소’ 소식을 2008년 국내 10대 뉴스중의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부의 노력과는 달리 정부는 1999년 이후 9년 만에 처음으로 쌀 한 톨 북한에 보내지 않은 어이없는 한 해였다. 교회지도자와의 대담이 아무리 새해를 맞는 덕담위주이지만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대담이 될 때 독자는 열심히 읽는다.

 

김유철/경남민언련 이사,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운영위원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