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06

15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십시오. 그가 말을 들으면 당신은 형제 하나를 얻는 셈입니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십시오.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중언을 들어 확정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히십시오. 17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십시오. 18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입니다. 19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20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오 18,15-20)

성격이 다른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라 해석하기 까다롭다. 15-18절은 마태오복음에서 적절한 곳에 배치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바로 앞의 12-14절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지는 21절 이하에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가운데 끼어서 고생이 많은 구절이다. 판단하지 말라는 구절과(마태오 7,1-) 또 어떻게 연결해야 하나.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17절은 예수 정신과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풀 수 없는 긴장을 내포한 이런 구절 앞에서 부족한 성서학자인 나는 맥이 풀리고 무능을 실감한다. 마이크만 잡으면 어떤 구절이든 척척 해설하는 종교인도 많던데, 그들이 참 부럽다. 우리 시대에 성서학자 노릇이란 정말 힘들다.

▲ The Synaxis of the Twelve Apostles. Russian, 14th century, Moscow Museum
죄는 심각한 것이며 그러나 용서받을 수 있다는 두 가지 생각이 15절에 담겨 있다. 개인의 죄는 개인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 공통이다. 공개적으로 형제의 죄를 경고하는 것은 이웃사랑의 표현이자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연대성의 표현이었다.(레위 19,17) 증인 두 사람은 신약성서뿐 아니라(마태오 26,60; 고린토후서 13,1) 유다교에도 공통이다. 17절의 이방인과 세리 부분은 죄지은 형제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그런 형제들과 접촉하지 말라는 경고다. 15-18절을 보는 해설자들의 시각은 다양하다. 교회에서 추방하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는 것을 주제로 보는 입장이 있다. 추방을 예외적인 경우로 보는 해설자도 있다.

초대교회에서 마태오 18,15-18을 죄지은 신자를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근거로 삼는 흐름이 보인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공인된 후 이 구절은 로마국민을 위한 교육 목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로마법을 어기면 로마국가에서 추방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국가를 위한 국민윤리 교육을 맡은 업보(業報)다. 고대후기 켈트족의 영향으로 교회 안에 공동고백은 점차 사라지고 개인고백과 회개성사가 도입되었다. 그후 15-18절은 의미가 달라지게 되었다. 형제자매끼리 서로 설득하고 훈계하는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런 권한은 모두 성직자에게 넘어가 버렸다.

19절은 예수가 유다교에서 배운 것이다. 적어도 성인 남자 10명이 모여야 하는 회당 예배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 두세 명이 모여도 하느님이 계신다고 유다교는 믿었다. 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슈바이처(Schweizer)는 그러나 ‘두세 사람’ 부분을 예수의 독창적 생각이라고 잘못 해설하였다. 19절은 15절과 연결하여 해석해야 마땅하다. 즉, 죄지은 형제자매을 놓치지 않고 ‘얻기’ 위해 공동체는 힘써 기도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교회 안에 파벌을 만들거나 교회 분열을 정당화하는 구절로 잘못 인용되기도 하였다.

19-20절은 오늘도 오해되기 쉬운 구절이다. 19절은 분명히 공동기도를 강조하였지만 많은 해설자들이 개인기도에 더 관심을 가졌다. 골방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도 애틋하지만 강정에서 대한문에서 밀양에서 함께 하는 기도는 더욱 간절하다. 기도에 대해 특히 주의할 점이 있다. 인간의 기도를 하느님이 다 들어주시지는 않는다. 기도를 해본 사람은 자신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을 무수히 했을 것이다. 거절당하는 기도가 분명히 있다. 성서정신에 합당하지 않는 기도, 개인적 분노에서 의롭지 못한 내용을 바라는 기도,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기도는 모두 거절당한다. 오늘 그리스도교에서는 기도의 힘을 자주 강조한다. 그러나 잘못된 기도는 거절당한다는 것을 그보다 먼저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의 90%는 아마 잘못된 기도일 것이다. 한반도에서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기도를 그리스도교적 기도라고 보아야 하는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제대로 된 기도로 보아야 하는가.

오늘 단락은 가톨릭에서 쓰는 교육적 명분의 ‘파문’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교회에서 추방으로 끝날 수도 있는 죄지은 형제와의 대화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모습과 모순되지 않는가? 하느님의 은총과 심판이라는 이 문제와 비슷한 모순이 성서 여기저기에 나타난다. 마태오는 이 긴장을 결국 풀지 못했다. 공동체가 매고 푸는 일을 중단하도록 마태오는 말하지 않았다. 초대교회가 조직화되면서 생긴 문제를 오늘 단락은 보여주고 있다. 오늘 단락에 나타난 여러 생각을 마태오는 조화시키지 못했다. 마태오의 능력은 무한하지 않다. 마태오를 넘어서서 우리가 오늘 단락을 정리해보자. 1. 교회에서 푸는 것은 매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이다. 2. 교회가 매놓은 것을 하늘에서 풀 수 있다.

오늘 단락을 근거로 교회에 생긴 추방(파문)은 서양 교회사에서 많이 변질되었다. 교회 안에서 권력투쟁의 도구로, 정치권력과 이해다툼에서 권력수단으로 수백 년 넘게 잘못 사용되었다. 종교지배층이 권력을 활용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오늘도 없지 않다. 99마리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모습을 예수는 보여준다. 그런데 99마리를 위해 한 마리 양을 내쳐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아니 한 마리 양을 위해 99마리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 가톨릭교회는 1%도 못되는 성직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99%가 넘는 평신도를 무시해오지 않았는가. 개신교는 가톨릭과 사정이 뭐 그리 다른가.

교회에서 파문당하는 경우가 아니라 스스로 교회를 떠나는 새로운 사례가 현대에 들어와 많이 생겼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온당한 가르침을 거부해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교회가 그 가르침을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경우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세례 받은 지 1년이 넘기 전에 성당에 나오기를 그만둔 사람의 비율이 적지 않다. 가톨릭교회에 매력을 느껴서 세례를 받았는데, 막상 성당에 다니다 보니 실망스러운 모습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개신교의 사정도 별로 다르지 않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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