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누누이 말하지만 인간은 배를 채워야 생명을 이어가고,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행복입니다. 인간은 시멘트를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밥을 먹으려면 숟가락도 필요하지만 당장 배가 고프다면 그 숟가락도 팔아 밀가루 수제비라도 해 먹어야 합니다.

도시 생활의 약점이란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일을 하고, 발에 흙을 밟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아닌 현실”에 사는 것이지요. 사이버 스페이스, 그러니까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우리말에도 자연스레 쓰이기 시작한 지 이제 한 십년이 좀 넘었습니다. 하지만 가상 현실이라는 것이 꼭 컴퓨터가 생기면서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인간 생명의 원천인 흙과 완전히 멀어진 도시가 나타나면서부터 첫 가상 현실은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겨우 20여년 전 소설 <붉은 10월>의 한 번역본에 “모조 우주”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요즘 다시 읽어보니 "cyber space"의 번역이더군요. 번역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 외부의 현실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 인간, 한 시대, 한 사회의 경험을 뛰어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에드워드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설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역사란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무슨 말인고 하니, 흙과 떠나 사는 인간은 생명의 원천에 대해서도 흙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없고 생명에 대해 관념적인 생각만 자꾸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관념적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현실에서는 흙이라는 것이 없으니 자연스레 나오는 사고의 결과물이 붕 뜬 관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에 컴퓨터가 새로 나와서 우리가 멋지게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말을 쓰는 것이지, 사실 그 전에도 이미 우리는 도시라는 가상 공간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가상 현실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시라는 가상현실


잠시만 옆으로 새자면, 원래 인간이라는 동물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옛일을 잘 간직하지 못하고, 뭐든 늘 자기가, 자기 시대가 뭔가 새롭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경향이라기보다는 거의 본성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것은 가짜 창조주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것을 '악'으로, '악마'로 의인화해서 표현했지요. 왜 그랬을까요? 옛일을 잊으면 현실에서 굶주림 등 구체적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슨 현학적 이유는 다 그저 현상에 대한 제 나름의 설명이 아닐까요? 아주 옛날에는 일식을 두고 개가 해를 먹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그것이 고매한 진리로 인정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달나라에 갔다 온 세상이라도, 하늘 아래 새 것 없다는 것을 자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가오는 대고통의 시대 경제난은 크게는 한국인의 자존심에 또다시 상처를 내고, 작게는 개인과 가정에 불화를 몰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 좋은 것이 바로 모든 사물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얘기이지요. 그 말 자체에는 상당히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또 상대주의적 요소도 있기에, 이런 주장을 삶의 1차원적 원칙으로 삼기에는 좀 저어됩니다. 그래도 앞으로 세상이 어려워질 것으로 본다면, 이런 말은 오히려 희망의 말이 될 수 있지요. 역시 세상이 달라지면 말과 이념과 신학의 가치도 전혀 반대로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칙은 물리학에 뿐 아니라 사상과 이념, 신학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베란다에 채소를 심는 것은 기본이 되겠지요. 필요하다면 아스팔트를 뒤집어서라도 흙이 드러난 땅을 확보할 것입니다. <닥터 지바고>에서처럼 땅을 찾아 탈출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먹는 것을 확보하는 데에 상상의 한계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쥐가 왜 비누를 갉아먹습니까? 평소에는 안 그러지만 이제는 그것이 최고의 먹을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빠삐용에서처럼 바퀴벌레를 손으로 잡으며, 오히려 그것이 통통하기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몇 년을 적에게 포위된 도시의 생활을 생각하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포위돼 있습니다. 성벽은 없어도 여러분은 어디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고 농사를 지을 땅도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위액이 소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독이 아니라면 뭐든 먹을 수 있습니다. 몇 년을 끄는 포위 상황에서 소가죽으로 된 군화를 삶아먹은 얘기는 흔하고, 인간 시체를 뜯어 먹으며 버티기도 하지요.

앞으로 올 일에 대해 상상에 제한을 두지 마십시오. 게다가, 우리는 포위돼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상 공간에 살고 있었고, 깨어나 보니 감옥 안 '수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비록 그것이 비참한 현실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가상공간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것과 현실에서 개똥밭에 구르다 죽는 것 가운데 여러분은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뭐, 둘 다 한 가지씩 장단점은 있지요.

배가 고프고 춥지 않으면 이미 부자


그래도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는 얘기는 40일 단식을 해 본 인간이 한 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배고파 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자가 그런 말을 할 때, 그것은 전혀 하느님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배부른 자의 헛소리, 거짓말입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파지면 문화를 누리지 못할까 걱정하는 이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문화는 하나의 필수품이지요. 전쟁터에서도 농담이 있고, 석기 시대의 인간들도 동굴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악기가 없고, 도구조차 없으면 인간은 자기 몸을 악기로 쓸 줄 압니다. 갤러리에 못 가도, 연주회에 못 가면, 주변과 숲의 이야기, 심지어 무너진 도시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아무리 어려워도 석기 시대보다는 좀 낫겠지요? 물론 저는 지금 앞으로 또 다른 '석기 시대'를 상정하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몸의 2/3가 물인 물그릇이므로, 문화가 차면 흔하게 버리게 되고 모자라면 찾아서 채워 넣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간 몰랐던 인생의 다른 면, 자연과 우주의 다른 얼굴을 만나면서 우리 인생은 더욱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입으로 들어갈 물건을 어떻게 확보할까 그것만 걱정하십시오. 그 밖에 모든 것은 다 사치입니다. 배가 고프고 춥지 않으면 이미 부자입니다.

한국이라는 나라, 사회, 그 속의 나에 대해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가 살던 세상이 어디까지 가상이고 무엇이 그간 모르던 실제 현실인지 부딪히게 됩니다. 대고통의 시대, 암의 고통은 닥쳐 오는데, 이왕이면 모르고 살다 죽는 게 나을까요?

박준영/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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