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05

10 여러분은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오.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12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13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14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마태오 18,10-14)

10절과 14절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앞뒤에서 병풍처럼 12-13절의 잃어버린 양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다. 잃어버린 양 이야기는 루가 15,4-7과 도마복음 107에도 전승되어 있다. 루가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을 강조한다면 마태오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강조한다. 양과 착한 목자 또는 악한 목자 이야기는 공동성서에 자주 보인다. 양은 이스라엘 백성(열왕기상 22,17; 이사야 13,14), 목자는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이사야 44,28; 미가 5,4) 또는 하느님을 가리킨다.(창세기 48,15; 에제키엘 34,12; 시편 23,1-3) 양을 골짜기에 방치하고 자기 자신만 돌보는 악한 목자 이야기가 나오는 에제키엘 34,1-6이 오늘 단락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10절의 그리스어 카타프로네인(katapronein)은 ‘업신여기다, 돌보지 않다’는 뜻이다. 업신여기지 말라는 경고 뿐 아니라 돌보아야 한다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악행을 저지른 것이 죄라면 선행을 게을리 하는 것도 죄다. 10절은 독자들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 놓고 말한다. 10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표현은 원래 왕궁에서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것을 종교적 언어로 도입한 것이다. 업신여기는 가해자에게 경고를, 피해자에게 위로를 전하는 10절 말씀이다.

▲ The Synaxis of the Twelve Apostles. Russian, 14th century, Moscow Museum
사람마다 자신의 삶을 보호하는 수호천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유다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고대 페르샤, 로마, 그리스 문화에도 그런 민간 신앙은 이미 있었다. 특별한 개인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생각은 유다교에서 비교적 오래 되었다(창세기 24,7.20; 48,16; 시편 91,11-13) 모든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하나씩 있다는 생각은 랍비 유다교에서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천사는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는 고급 천사계급에 속하지 않고 지상에만 머문다고 여겨졌다. 10절의 천사는 이와 달리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고 소개되었다.

10절은 그리스도교 천사학(天使學)의 고전적인 구절에 속하며 사람들이 개인적 수호천사를 믿게 만든 구절이다. 수호천사에 대한 믿음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졌다. 그 믿음이 마태오 18,10, 사도행전 12,15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니고 그 구절들이 그 믿음을 재확인한 것이다. 수호천사는 세례 받은 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따라다닌다고 여겨졌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랍비들처럼 수호천사를 낮은 계급의 천사로 보았다. 루터(Luther)는 수호천사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캘빈(Calvin)은 10절에서 수호천사의 존재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가톨릭 교리서는 천사의 존재,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을 교리로 가르치고 있다.(가톨릭 교리서 328, 336) 수호천사에 대한 설명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 역사의 희생자 곁에 가까이 계신다는 그 본래 메시지는 중요하다.

12절에 소개된 목자의 행동은 실제 목자들의 처신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그 목자는 99마리 양을 먼저 우리에 모아두거나 다른 목자에게 부탁한 후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설 수도 있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보다 99마리 양이 덜 중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마태오는 그런 상세한 설명에 관심이 없다. 목자의 모습에서 신자들의 올바른 태도를 제시하고 목자 뒤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기억하도록 촉구하려는 게 마태오의 의도다. 심판에서 어느 누구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신도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과 착한 목자 이야기는 초대교회에 특히 풍부한 영향을 끼쳤다. 착한 목자는 구세주, 양은 전체 피조물, 99마리 양은 천사,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은 죄에 빠진 인간이라고 오리게네스(Origenes)는 해설하였다.

오늘 단락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대목(마태오18,21-22)을 마태오는 곧 소개한다. 그런데 오늘 단락에 이어질 마태오 18,17에는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는 신자를 마치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대목이 나온다. 성서 구절 사이의 이런 긴장 관계를 마태오는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목자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흔히 성직자로 비유되고 있다. 성직자가 자동적으로 착한 목자라는 뜻은 아니다. 악한 성직자가 적지 않음을 역사와 현실이 보여준다. 또한 목자의 비유를 성직자에게 제한하여 사용할 필요도 없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곧 목자다. 그리스도교 안에 착한 목자도 있고 악한 목자도 있다. 착한 목자에게 교만함은 이미 없다. 남을 돕고도 우월감에 빠지지 않기는 어렵고, 나를 도와 준 사람을 남몰래 미워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착한 목자가 되도록 애써야 하겠다.

‘나는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고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교황도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고 대형교회 목사나 가톨릭 주교도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다. 잃어버린 양 처지에 착한 목자로 행세하는 종교인도 많다. 나를 구출해줄 목자가 내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양은 신앙의 형제자매들에게 겸손되이 도움을 청해야 하겠다. 내가 내 인생의 스승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착한 목자인지 잃어버린 양인지 언제나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착한 목자이고 동시에 어느 정도 잃어버린 양이다. 그러니 10절 말씀 “보잘 것 없는 사람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을 매일 살펴야 한다. ‘을’을 무시하고 ‘감정 노동자’를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안타깝다. 교회 안에 그런 모습은 없는지 반성할 일이다. 교황이 ‘종들의 종’이듯, 성직자는 ‘을중의 을’이다. 그런데 마치 ‘갑중의 갑’으로 행세하는 철없는 성직자도 있나 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