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10]

▲ <로시니의 초상화>, 카무치니의 작품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는 희극적이고 대중적인 작품이지만, 보고 들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로시니는 일반 대중들뿐 아니라, 독일의 철학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던 작곡가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빈이나 파리에서는 베토벤보다도 더 인기가 있었습니다.

헤겔은 <세비야의 이발사>를 보고난 후, “이 얼마나 대단한 목소리, 기술, 사랑스러움, 민첩함, 강도, 음향인가. 사람들은 이것을 꼭 들어야 한다”고 부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또 쇼펜하우어도 “로시니의 음악은 실로 명료하고 순수하게 음악 고유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전혀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고, 따라서 오직 악기만으로 연주해도 충분히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썼습니다.

이럴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로시니는 다작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나이 30대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썼습니다. 하지만 서른일곱 살 때 오페라 <기욤 텔>을 발표하고 난 이후,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로시니는 그 이후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나 파리에 머물면서 요리 레시피를 개발하고 요리에 관한 책도 쓰는 등 식도락을 즐기며, 귀부인들과 교제하면서 40년을 더 살다가 일흔여섯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를 보면, 첫 서주부터 시작하여 막을 내릴 때까지 스토리의 전개가 경쾌하며 긴장감이 넘치고 역동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기악 연주만으로도 주는 감동이 특별합니다.

그런데다가 무대 장치, 조명, 의상, 가수들의 연기력까지 더하니, 작품을 듣기만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감동이 더할 것입니다. 물론 오페라 같은 경우는 반복해서 볼 기회가 있으면 그때마다 느낌이 달라질 수 있겠지요.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816년 로마에서 <세비야의 이발사>를 초연할 당시, 오페라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어떠했을까. 지금보다 오페라에 대한 인기가 덜하지 않았을까. 그라우트는 당시의 오페라에 대해 <서양음악사>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전반기는 여러 점에서 오페라의 황금시대였다. 서유럽 전체에 오페라 극장이 새로 건립되었고, 오페라 붐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도 전파되었다. 대다수의 오페라 극장은 흥행주에 의해 수익 사업으로 운영되었고, 대개 정부 지원이나 개인 후원을 받았다.

상류층과 중산층의 일원들은 오페라에 참석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오페라에 가는 것이 음악에 대한 애정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라 여겼다.

오페라 하우스 밖 여기저기에서 오페라의 발췌곡들이 울려 퍼지면서, 그것이 대중문화 및 엘리트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루었다. 개별 곡들과 전곡 악보가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여러 버전으로 출판되었고, 살롱과 가정에서 아마추어에 의해 연주되었다.

오페라 발췌곡들은 피아노곡으로 편곡되었고, 서곡과 아리아는 원곡 형태로 혹은 편곡되어 콘서트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오페라들은 해학극이나 인형극 혹은 여타 대중 연극의 형태로 축약되거나 패러디되었고, 오페라 아리아의 선율들은 카페 오케스트라나 심지어 손풍금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 당시의 오페라는 어떤 유형이든 엘리트 관객과 광범위한 청중 양쪽 모두에 인기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보다 오페라가 더 대중화되었고,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셈입니다.

로시니가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한 시기는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였지만, 그 전에 이미 16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그는 열여덟 살 때부터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서른일곱 살 때까지 19년 동안 서른아홉 편의 오페라를 썼습니다.

<세비야의 이발사>는 그가 오페라를 작곡하기로 계약을 하고나서 13일만에 완성하였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이전에 썼던 오페라가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경우, 그 오페라에 사용했던 곡들을 빌려와서 새 오페라에 썼기 때문에, 1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오페라 한 편을 완성시킬 수 있었지요.

도니제티는 ‘로시니가 13일 동안에 오페라 한 편을 썼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로시니는 게을러서 13일씩이나 걸렸다’고 빈정거렸다니, 당시에는 오페라가 어떤 방식으로 작곡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같은 일은 오늘날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었나 봅니다.

어쨌든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은 반대파의 방해 공작에 의해 엉망이 되었지만, 두 번째 공연 이후 점점 인기가 올라가서 이내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베토벤을 만나고 싶어 했던 로시니는 신혼여행 도중 베토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로시니는 서른 살, 베토벤은 쉰두 살이었습니다. 베토벤은 로시니에게 이탈리아에 오페라가 존재하는 한 로시니의 곡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칭찬하면서, 희극적이고 대중적인 오페라를 계속 쓰도록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의 칭찬과 격려에도 불구하고, 로시니는 서른일곱 살 이후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의 대표작 <세비야의 이발사> 한 작품으로만 기억되는 작곡가가 되고만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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