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일도(聖務日禱)는 거룩한 직무로서 바치는 일상의 기도입니다. 영어로도 ‘divine office’, 곧 거룩한 직무라고 부릅니다. 이 기도가 ‘거룩한’ 직무 혹은 의무가 되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이기 때문입니다. 사제, 부제, 성무일도를 바칠 의무가 있는 수도공동체와 그 회원들(쉽게 말해 수도자들)은 이 특별한 기도를 날마다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꼭 그들만이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이 기도를 적극 권장합니다.

수도자가 되기 전까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돌이켜 보니 제 부친께서는 아주 열심히 성무일도를 바쳐오셨습니다. 제가 기도에 조금이라도 더 흥미가 있었다면 과감히 여쭤봤을 텐데...라고 이유를 들지만, 사실은 부친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어려웠다는 걸 고백합니다. 그때는 부자간의 대화가 왜 그렇게도 어려웠나 모릅니다. 뭐... 이러나 저러나 기도에 대해 무지했던 만큼 열정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황동환
부친을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그 기도, 성무일도의 다른 이름은 ‘시간경’입니다. 매우 이른 아침(혹은 늦은 밤)부터 하루 동안 특정한 시간에 맞춰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시간에 따라 약간씩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시간에 맞춰 성무일도를 따라가면, 시편을 주로 노래하게 되고, 성경과 교부, 성인들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청원기도를 통해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시간도 있습니다. 저는 부친을 통해 알게 된 성무일도를 예수회에 입회해서야 제대로 배우게 된 셈입니다.

이 기도의 기원은 유다인들의 기도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은 하루에 여러 번 하느님께 찬양을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당신을 찬양하니”-시편 119,164). 사도들도 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동트는 시각을 아침 여섯 시로 하고, 이 때 부터 세 시간 단위로 시간을 정한 것입니다. 삼시경(terce, 아침 아홉 시, 사도 2,15), 육시경(sext, 정오, 사도 10,9), 구시경(none, 오후 세 시, 사도 3,1), 밤기도(사도 16,25) 등). 여기에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이른 새벽기도 등을 보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무일도는 하루 동안 수시로 하느님을 생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무일도는 좀 간략화 되어 주된 골격은 아침, 점심, 저녁, 마침기도 등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봉쇄 수도원에서는 여전히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을 유지하는 곳도 있습니다.

부제품을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 남쪽 앙뒤즈(Anduze)시의 까바눌(Cabanoule)이라는 시골 동네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녀원 피정집에서 열흘간 식별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정자들도 시간경에 언제나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피정기간 동안, 성무일도 시간에 모두 따라가 기도해 보려고 시도해 봤습니다. 며칠 해보고는 그냥, 아침, 저녁기도와 밤기도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입니다.

종소리에 깨어 일어났는데, (제 기억으로는) 기도를 새벽 세 시 즈음부터 시작하니까 이른 아침부터 온 종일 기도하는 상황이 되는 셈이니 마음은 뿌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개인기도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개인기도는 지금까지 살아온 제 인생 여정에 대해 성경 말씀을 통해 정리하며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성직을 받는 것에 대해 그 의미를 새기고 마음을 다져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시간경에 일정을 맞추다 보니 제 박자를 잡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게으른 육신이 성무일도 한 번 바치고 오면 졸음에 못 이겨 그냥 스르르 잠이 든 탓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히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기도 시간에 수녀님들과 몇몇 피정자들이 함께 모여 전해드린 찬양을 하느님께서 좋아하셨다고 확신합니다. 시간경을 마치면 바로 숙소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보통, 침묵 중에 산책을 했는데, 낮에는 라벤더 향기가 한여름의 메마른 대기에 번져나갔고, 저녁에는 높은 나무를 흔드는 미풍이 산책하는 제게 큰 위안을 줬습니다. 그렇게 자연과 기도가 주는 평화 안에서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성직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제가 경험했던 성무일도는 출근과 노동, 퇴근 후 다양한 활동, 늦은 귀가를 반복하는 현대적 생활리듬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도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리듬을 볼 때, 시간에 쫓길 필요 없이 단순한 노동이 허락되는 환경에 적합한 기도이며, 개인보다는 함께 모여 (이왕이면 노래로) 바칠 때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나는 전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침, 저녁, 잠들기 전에라도 우리가 이 기도를 의식한다면, 우리는 하루를 하느님을 찬미하며 시작할 수 있고, 그분께 감사하며 일과를 마치게 됩니다. 아침과 저녁 기도 사이에 우리가 했던 노동은 하나의 아름다운 기도가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하루 전체에 감사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겁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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