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23] 지혜 1,1-7; 루카 17,1-6

* 이 글은 11월 11일 대한문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앞에서 봉헌한 미사의 강론입니다.

▲ 박동호 신부
‘황당’과 ‘당황’의 차이에 대해서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차 뒤에서 숨어서 큰일을 보고 있는데, 그 차가 갑자기 출발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을 황당이라 하고, 그 차가 슬금슬금 후진할 때 느끼는 당혹감을 당황이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당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류가 이른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까지는 수천 년이 필요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위해 피를 흘렸는지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역사가 성공한 사람들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무엇을 성공이라 할지는 차치하고라도). 왕의 역사, 장군의 역사, 학자들의 역사, 위대한 예술가들의 역사 등등. 우리가 노예들 혹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해방의 역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막연히 짐작해봅니다. 지구 곳곳에서 신분사회의 차별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조 노예들이, 평민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으며, 또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의 눈물겨운 사투는 외면하려는 그 모습은….

사진 제공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앞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겨우 차가 떠남으로써 더 이상 숨 막히게 살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과거 전근대 신분사회에서는 이른바 지체 높은 분들이 탐욕스러웠고 불의했더라도 아랫것들을 최소한으로라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못했다면 모든 일을, 하다못해 밥상 차리는 일까지 손수 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차가 후진하는, 그것도 맹렬히 후진하고 있고, 전 지구인, 보통의 평범한 시민은 속수무책의 처지로 내몰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를 자본의 역습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불과 수백 년도 되지 않는데, 그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 자본 앞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집어삼켰습니다. 가정도 무너졌고, 정치도 종속되었고, 경제도 재편되었고, 문화도 상품화되었으며, 국제질서도 자본시장에 굴복했습니다.

최근에는 그나마 시민의 자유를 지켜줄 것이라 기대했던 정부, 혹은 국가마저 자본의 시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법’ 혹은 ‘공권력’이란 장치로 자본의 횡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구 곳곳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구화 혹은 세계화는 자본, 특히 금융자본시장의 단일화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국가가 그 단일화에 방해물이 되는 국경을 앞장서서 허물어뜨리고 있으며, 시민을 지켜주었던 법률을 폐기하고, 자본시장을 지켜주는 법률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고, 시민은 그 입법자들을 뽑느라고 또 정신이 없습니다.

평범한 대부분의 시민은 이 자본의 위력, 자본의 폭력 앞에 무방비의 속수무책입니다. 자본이 재채기를 하면 대다수의 시민의 삶이 황폐해지는 일이 더 이상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권력과 정부는 대기업, 대자본가를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이를 우리는 정경유착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은 한 술 더 떠서 대기업과 대자본가가 절대 권력의 맹주가 되었고, 실질적 주인이 되었으며, 행정부든 입법부든 사법부든 언론이든 지식사회든 종교든, 이 대자본가에 노골적으로 기생하는 형국, 부역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 자본과 그에 부역하는 집단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적이익’과 ‘권력’을 취하려는 ‘폐쇄적 지배집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나마 간신히 누리게 된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그 권력으로 빼앗고, 경제적 불평등과 경제적 종속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현대 사회의 “남을 죄짓게 하는 일”입니다. 현대의 대죄는 바로 ‘자본의 무절제한 탐욕’과 그에 부역하는 ‘폐쇄적 지배집단’인 것입니다.

사진 제공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그 탐욕과 폭력 앞에서 우리 시민은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 탐욕과 폭력 앞에서 우리 시민은 자유든, 정의든, 진리든, 사랑이든, 모두 포기하고 버려야만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여 핵실험을 하는 것도,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고가의 첨단 무기를 구입하는 것도, 전국의 강을 파헤치는 것도, 핵발전소를 짓고 전 국토에 송전탑을 짓는 것도, 기업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수많은 노동자를 극한 고통과 죽음으로 내모는 것도, 시민들의 참정의 권리를 국가기관들이 나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침탈하여 권력을 잡는 것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적 이익과 권력을 취하려는 ‘폐쇄적 지배집단’이 ‘자본의 탐욕’에 부역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들은 “작은이들을 죄짓게 하면서도” 태연합니다. 지금 우리는 ‘당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당황의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 ‘당황의 시대’는 우리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뢰, 곧 신앙을 증명하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이 자본의 맹렬한 역습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시험하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이때야말로 지혜서 말씀처럼, 우리 교회와 신앙인이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하고 꾸짖고 외쳐야 할 때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그 ‘탐욕의 늪에서’ 희희낙락하더라도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도록 말입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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