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04

6 그러나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하나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입니다. 7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이 세상에 죄악의 유혹은 있게 마련이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8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버리시오.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습니다. 9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리시오.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습니다.(마태오 18,6-9)

3번 나타나는 스칸다론(skandalon)이 오늘 단락의 핵심 단어다. 성적性的 유혹이나 파문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공동성서에서는 하느님 백성의 삶을 파괴함이란 뜻을 가진 단어다.(판관기 2,3; 호세아 4,17) 마태오에서 그 단어는 예수를 거부함(11,6;13,57;15,12;26,31;31,33), 믿음이 없어짐(13,21; 24,10)과 연결된다. 공동번역에서는 ‘죄짓게 하다’로, 개신교에서 쓰는 개정개역 성경에는 ‘실족(失足)하게 하다’로 옮겨져 있다. 어린이란 단어가 작은 사람(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6절과 8절은 조건절 관계문장을 통하여 명령문으로 마무리된다. 대본인 마르코 9,42-49에 비해 마태오 18,6절에서 ‘나를 믿는, 이’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마르코 9,42에서 ‘바다에’가 마태오에서 ‘깊은 바다’로 바뀌어 그 경고 말씀이 더 강화되었다.

오늘 단락의 청중이 누구인지 확정하기 어려운 탓에 해설하기 쉽지 않다. 6절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뚜렷하지 않다. 8절은 유혹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인 것 같다. 7절에서 8절로 넘어가는 흐름도 매끄럽지 않다. 앞 단락의 어린이는 오늘 단락의 보잘 것 없는 사람과 동일한 것 같다. 그런데 왜 표현을 갑자기 바꾸었을까. 마태오의 어설픈 편집 솜씨 탓에 성서학자들의 고생이 적지 않다.

▲ <율법학자들 가운데 선 예수>, 알브레히트 뒤러, 1506년
연자맷돌은 당나귀, 말 또는 종이 쓰던 맷돌 윗부분의 무거운 돌이다. 맷돌은 삶의 무게를 상징하는 단어이자 간혹 시행된 사형 방법이기도 하다. 맷돌은 심판 날을 가리키는 예수의 말이다. 6절에서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마태오는 이 표현을 마르코 9,42에서 발견하여 여러 곳에서 사용하였다.(마태오 10,42; 18,6.10.14) 그 단어가 그리스도교 신자를 가리키는 굳어진 표현은 아니었다. 공동체 내부의 특정 그룹을 가리키는지 신자 전체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마태오 18,3에 나타나는 어린이처럼 ‘낮은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7절 죄악의 유혹은 인간을 향하여 하는 말이다. 동식물이나 자연이 인간을 죄로 유혹할 수는 없다. 마태오는 거짓 예언자를 의식한 것 같다.(마태오 7,15-23) 오늘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대표적인 거짓 예언자의 이름 몇 개를 대부분 국민들은 알고 있겠다. 오늘 단락을 읽고 속으로 움찔하는 종교인들이 적지 않겠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신학대전 ‘드 스칸다로(de scandalo)’ 편에서 대죄인 유혹과 소죄인 유혹을 따로 분류하였다. 그런데 그에게 오늘 단락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마태오는 그런 분류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

8절과 9절에서 예수의 말씀은 대단히 거칠다. 어지간히 겁주면 되지 자결을 권유하듯 심하게 말할까. 불구의 몸이 아닌 예수는 불구의 몸을 지닌 사람들 심정을 잘 몰랐던 탓일까. 이런 예수의 과장된 어법을 배울 필요는 없다. 무심코 사용한 비유에 뜻하지 않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다. 성서무오설을 좁게 해석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도 8절과 9절을 참고하여 죄짓도록 유혹한 손이나 발을 자르고 눈알을 뺐다는 소식을 나는 듣지 못했다.

8절과 9절은 심판이 이루어지는 실제 장면을 묘사하는 말씀이 전혀 아니다. 이 단락을 근거로 심판 날에 우리 몸이 어떻게 된다고 엉터리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어가 존재를 반드시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용’이라는 단어가 용이라는 동물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옥이나 연옥이란 단어가 곧바로 지옥과 연옥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옥이란 단어에서 반드시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뜻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아무도 없는 ‘텅빈 지옥’이면 참 좋겠지만 그것 역시 하느님의 판단영역에 속한다. 천국에 몇 명이 가느니, 연옥에서 누가 고통 받느니 하는 주장을 들으면 웃음이 나온다. 누가 하느님 생각을 알아냈던가. 누구는 구원받느니 못 받느니 하는 말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말 하려면 본인이 하느님이라는 증명서를 제출하시라.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다’는 7절 말씀에서 우리 모두 가슴이 먹먹하리라. 그런 세상이 저주스럽겠다. 그런 세상에 이바지한 사람들의 미운 얼굴이 떠오르리라. 그런 세상에 일조한 우리 자신의 삶의 역사가 괴로우리라. 내 탓 없이 남의 죄로 인해 내가 피해보는 세상, 내 죄로 남이 희생되는 세상을 신학용어로 ‘원죄’라고 한다. 내 탓 없이 내가 당할 때는 억울한 생각이 들지만, 내 죄로 남이 당하는 모습 앞에 나는 할 말이 없다. 개인의 죄가 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범위가 현대사회에서는 갈수록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

죄지을 가능성이 많고 중죄를 범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 더 먼저 회개해야 한다. 돈, 권력, 명예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큰 죄를 범하기 쉽다. 상류층, 고학력,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자들이 큰 죄를 더 자주 범하기 쉽다. 지배층 종교인일수록 더 큰 죄를 범하기 쉽다. 정보와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 죄를 덮을 능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잘 것 없는 사람은 하늘 아래 아무도 없다. 가장 변두리에 처한 사람을 먼저 돌아보는 우리 사회라면 참 좋겠다. 인권이 무시되는 경우가 잦은 한국사회가 참 안타깝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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