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황님이 가톨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신다. 그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불게 될까. 이분은 그동안 눌려 있던 사람을 북돋아주는 분인가. 또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분인가. 영웅에게 환호하기보다, 내면으로 성찰해서 그분을 닮아보려는 것은 어떨까.

새 교황님이 주는 울림

멀리 세계 교회를 내다 볼 능력은 없기에, 질문을 국내로 좁혀 보겠다. 과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일으키신 바람을 ‘한국 가톨릭교회의 정의 평화 세력’이 어떻게 받아야 순항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이 교황님이 어떤 분이신지 봐야 할 것이다. 현 교황님을 헤아리는 일이야 필자 같은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겠다. 다만 이분은 어떤 큰 영감과 비전을 주신다. 교황 취임 이후 몇 달 동안 이분의 강론을 영어와 독일어로 거의 매주 읽으면서 큰 감동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점차 또렷해졌다. 이분의 말과 행동은 뼛속까지 복음적이고, 그리고 그 깊이가 대단하기에 큰 울림을 주신다고.

사회적으로 투신한 사람을 제법 접하며 산다. 민주화된 나라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십 년간 한 분야에서 어려움을 이기고 버텨내신 것만으로 존경받아야 할 분들이고, 가능한 한 그분들의 말씀을 경청하려 애쓴다. 그분들 가운데 일부는 이 교황님에 환호했다. 교황님은 그런 분들에게 감동을 주셨다. 우리나라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거의 매주 그런 언행이 이어졌다. 필자는 이 점이 매우 놀랍다.

그런 영감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새 교황님이 이미 ‘사회적으로’ 깊이 투신하신 분이기에 그런 영감을 주는 말씀과 실천을 일상처럼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 교황 프란치스코가 ‘성 마르타의 집’ 미사 중 강론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교황청 유튜브 갈무리 youtube.com/vatican)

복음과 전통만으로 더 사회적인 메시지를

필자는 성서언어학자다. 성경에 사용된 언어의 사용에 나름 민감한 편이다. 필자가 새 교황님의 강론을 보며 느낀 특이한 점이 있다. 사회적으로 깊은 영감과 자극을 주는 이분의 말씀에 사회과학적 용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 대신 성경의 언어를 풍부히 사용하신다. 그리고 교회 전통의 영성적 언어를 많이 쓰신다.

교황이라 이렇게 말씀하실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난 교황들도 거의 다 그러시지 않았나. 그런 언어로 전세계 시민에게 개혁적 영감을 불어넣는 일은, 지난 교황 중에서도 무척 소수만이 하셨던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매우 높은 경지’를 본다.

이런 교황님의 언어를 보며, 곧장 우리의 언어생활을 돌아본다. 사람을 알아보는 익숙한 방법은 용어를 관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개 좌파 쪽에서는 ‘교양’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살림이 넉넉하고 여유시간 넘치는 부인네들이 백화점 교양 강좌나 들락거리는 분위기를 떠올리는 것 같다.

그 대안으로 ‘상식’이란 용어를 선호한다. ‘경제 교양’, ‘노동 교양’은 별로 없지만, ‘경제 상식’, ‘노동 상식’은 자주 보인다. 문제는 이런 ‘가름’이 고리타분한 ‘명분론’처럼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훈고학적인 ‘진영 논리’에 갇히면 ‘가톨릭 교양 강좌’에 사회교리적 내용을 담아 대중을 높일 상상력은 학살당한다.

가톨릭 사회교리야말로 신자들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교양 아닌가. ‘교양’을 버리고 ‘상식’을 추구하면 그만큼 진보적이 되는가?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닌가? 하지만 명분을 ‘교양’으로 내걸고 ‘상식’의 내용을 싣자는 제안도 엄밀히 말하면 틀렸다. 내용이 또렷이 구분되지 않는 코드에 목을 맬 필요 없다. 이런 이분법에 충실하면 이번 교황님 같은 경지를 꿈꿀 수 없을 것이다.

교황님의 강론을 읽으며, ‘복음적이고 전통적인 표현’만으로 더 울림 있고 지극히 사회적인 메시지를 주는 경지가 새삼 다가왔다. 그리고 과연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다시 성찰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사회과학은 교회의 보조적 수단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기에 신학은 사회과학적 개념을 수용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전공을 게을리 할 수는 없지 않나. 거듭 말하지만, 복음의 용어만을 쓰자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만으로 충분하고, 복음만으로 초과 실현할 수 있는 경지를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바람’이 열어주는 공간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프란치스코 바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일단 그동안 교회 구석에서 숨죽여 있던 사람들에게 훈풍이다. 해방신학자들은 복권의 흐름을 탄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신하고 애쓰던 분들에게 위로가 된다. 한마디로 이 바람은 어떤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그런데 성령의 바람이 열어주시는 공간을 그저 즐겨야만 할까. 이는 정의 평화 세력에게 ‘확산의 기회’이기만 할까.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다. 그리고 교회 개혁은 모르겠지만,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적극적인 세력이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교회 운영에서 소외되어 왔던 정의 평화 세력은 더 많이 기회를 얻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교회적’이 되라는 압력을 받을 것 같다. 결국 ‘더 교회적이면서 더 사회적이고 더 개혁적인’ 프란치스코의 길이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걱정이 남는다. 과연 ‘교회적’이면도 동시에 ‘개혁적’이 될 수 있을까. 그동안 말과 실천으로 ‘교회적’을 방치하며 살았다면, 이런 ‘전향’이 거북하지 않을까.

초대를 느끼는가

수십 년 전,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단순한 ‘비판세력’을 넘어 교회의 운영 원리를 제시한 적이 있다. 당시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참조사항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정의 평화 세력의 많은 분들은 지속적으로 교회의 운영에 대해 비판했다. 교회와 성직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겸손해져야 한다고. 교구 중심의 일방적 운영에서 수도회와 평신도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등의 비판은 이제 익숙하다.

하지만 이제는 정의 평화 세력이 스스로 교회적이 되어 교회에 흡수되고 확산되는 때가 도래한 것인가.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쪽은 제도 교회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보다 먼저 움직이시고, 변화는 문득 도래하는 법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번 교황의 선출이 그랬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초대하시는 것 같지 않나. 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에 돌직구를 과감히 던지고, 보통 사람들과 진보적 관심사에 충분히 공감하고 울림을 주면서도, 교회적이 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분은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삶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는 분으로 역사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리고 그분의 초대에 응한 사람은 이분이 하시는 일을 이을 것이다.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가톨릭 학생회를 거쳐 평신도 신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하고, 현재 그리스도교 원천 문헌 번역에 힘쓰는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며 서강대 종교학과와 신학대학원에 출강한다. 히브리 성경과 고대 근동 문헌을 읽으며 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종교들> 번역에 참여했고, <구약성경과 신들>, <우가릿어 문법>, <우가릿어 사전> 등을 냈다.


*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 우리신학연구소 월간지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11월호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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