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 102

24 그들이 가파르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성전세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당신네 선생님은 성전세를 바칩니까?” 하고 물었다. 25 “예, 바치십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시몬이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상 임금들이 관세나 인두세를 누구한테서 받아냅니까? 자기 자녀들에게서 받습니까? 남한테서 받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26 “남한테서 받아냅니다” 하고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27 그러나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이렇게 하십시오.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맨 먼저 낚인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시오. 그 속에 한 스타테르짜리 은전이 들어 있을 터이니 그것을 꺼내어 내 몫과 당신 몫으로 갖다 내시오.”(마태오 17,24-27)

성전세금 걷는 사람들과 베드로의 대화, 집안에서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마태오에만 보이는 이야기다. 성전세는 거주지에서 부과되므로 예수와 베드로가 사는 가파르나움이 등장했다. 1년에 한번 1/2 스타테르를 내는 성전세는 성인 이스라엘 남자들에게만 부과되었고 여자, 노예, 어린이들은 제외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70년) 이후 성전세는 같은 액수의 세금을 로마에 내는 피스쿠스 유다쿠스(fiscus Judaicus)로 대체되었다.

언제부터 성전세가 모든 유다인에게 매년 내는 의무로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예수 시대에는 당연한 일로 여겨졌고 해외에 사는 유다인에게도 의무였다고 성서학계에서 그동안 이해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그러한 의견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오직 바리사이들만 성전세를 냈다고 잘못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성전세의 근거는 출애급기 30,11-16이다. 그런데 사두가이들은 성전세 납부를 거부했다고 기록한 문헌이 많다. 사제로서의 특권에 의지하여 성전세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희생제물은 자발적인 헌금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헌금을 마치 의무처럼 설명하는 우리 시대 종교인들이 깊이 새겨들을 말이다.

▲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15~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네(Giorgione)의 작품
페르샤와 그리스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대에는 성전제사에 드는 비용을 국왕이 맡았다.(에즈라 6,8-12; 7,15-18; 마카베오하 3,3) 페르샤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시기에 쓰여진 공동성서 책인 역대기 상하, 토비트서에 성전세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면 성전세를 자발적인 세금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이런 관행은 살로메(Salome) 시대(BCE 76-67)에 바뀐 것 같다. 바리사이들은 순수한 유다인의 헌금으로 성전제사 비용을 마련하자고 주장하였고, 사두가이들은 이전 관행을 따르자고 고집하였다. 예수 탄생 전에 성전세는 모든 유다인에게 부과된 것 같다. 공통년(서기) 6년의 인구조사에 저항해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세금으로부터 해방은 마카베오 시대부터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마카베오상 10,31; 11,35-)

25절 예수의 질문은 세금 걷는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한 것이다. 관세는 간접세를, 인두세는 직접세(tributum soli, tributun capitis)다. 국왕은 자발적으로 세금을 냈지만 가족들에게는 면제시켰다.(사무엘상 17,25) 자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 오늘 단락은 성전파괴 이후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 시대에 초대공동체가 부닥친 피스쿠스 유다쿠스(fiscus Judaicus)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성서학자들이 그렇게 잘못 이해하였다. 이스라엘에서 로마에 내는 세금이 존재했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Luz)는 주장한다. 24절에서 예수가 성전세를 자발적으로 내는지 세금 걷는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27절에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표현은 70년 이전 초대 공동체의 상황에 잘 어울린다.

예수는 십일조 의무에 대해 거리를 두었다.(마태오 23,23 이하)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을 쫓아낸 사건(마르코 11,15-17)은 예수의 삶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 사건이 예수 죽음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와 경제행위를 연결한 유다교 지배세력에 대한 예수의 저항이었다. 갈릴래아의 가난한 사람들이 해마다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의무에서 해방시키려는 행동이기도 하다. 27절에서 초대공동체가 유다교와 충돌을 삼가려고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물고기에서 돈을 발견하는 사건은 예수의 이적능력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난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마태오 시대에는 이미 성전세가 사라졌는데 왜 이런 이야기를 마태오는 수록했을까? 유다인의 전통을 지키는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예수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역사를 흔히 고난-죽음-부활이라고 보는 틀이 못마땅해서 그것을 나는 저항-죽음-부활로 바꾸었다.

성전세를 로마에 내는 세금으로 오해하면서, 오늘 단락은 교회사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오늘 단락을 마르코 12,13-17, 로마서 13,1-7과 연결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법적으로가(de iure) 아니라 사실상(de facto) 국가에 복종하며 세금을 내야 한다는 식으로 잘못 해설되었다. 개신교 전통에서 두 왕국이론(Zweireichelehre)의 근거로 쓰이기도 하였다. 중세 후기에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국가에 대한 세금납부 거부의 근거로 잘못 사용되었다. 성서신학이 제법 발전한 지금, 그렇게 해설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종교와 정치가 일치한 당시 이스라엘과 오늘의 한국은 세금 문제에 있어 상황이 같지 않다. 오늘 단락에서 감히 제안하고 싶은 말이 내게 있다. 1. 교회와 성당에서 헌금문제가 진지하게 신학적으로 토론되길 바란다. 가톨릭에서 미사예물, 교무금, 주일헌금 문제를, 개신교에서 십일조 문제를 거론하고 싶다. 의무헌금을 자발적 헌금으로, 그리고 액수를 크게 낯추길 바란다. 종교인들의 세금 납부 문제도 함께 고심하길 바란다.

구원 문제에서 돈이라는 주제가 거론될 수는 없다. 세상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그렇게 말한 적 없다. 또한 가난한 교회라는 목표도 명심해야 한다. 어떻게든 신자들에게 헌금부담을 줄여야 한다. 헌금을 자꾸 요구하면 교회는 부자에게 가까워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서 멀어지며, 종교인들의 삶과 생각은 흐트러지게 된다.

27절에서 당당하고 떳떳하지만 이웃을 배려하는 초대공동체의 마음을 배우자. 한국 가톨릭 신부들에게 이미 유행이 된 골프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건강, 휴식 등 많은 당당하고 떳떳한 이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골프를 중단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로만칼라에 골프백을 든 신부를 제주공항에서 만나는 일은 이제 내게 지겹다. 그들이 골프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할 뿐더러 골프를 중단하지 못하는 이유는 더 해괴하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골프장에 출입하는 날까지 주교와 신부들은 골프장에 가지 않길 바란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멋진 개인플레이로 득점하면 뭐하나. 교황 프란치스코를 자꾸 선전하려 하지 말고 먼저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라.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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