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신부의 Spring Tree]

나는 아침마다 도시락을 챙겨서 도서관에 간다. 독서삼매에 빠지다 보면 어느 새 배꼽시계가 점심시간을 알린다. 점심이 되면 대부분은 식당 밥을 먹지만 나는 아직도 도시락을 고집한다. 도시락을 가져온 이들끼리 서로 집에서 가져온 반찬을 나누면 금방 진수성찬이 되고 반찬의 가지 수 만큼 이야기도 풍성해 진다.

가을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오늘은 주방언니들이 챙겨주신 도시락을 들고 매점과 식당을 가다가 갑자기 가을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단풍나무 숲이 우거진 공원이 우리에게 손짓했다. 가을 소리와 공원의 손짓은 순전히 내 생각이다. 함께 있는 이들에게 가볍게 제안해 본다.
“우리 공원에서 먹을까?”
동시에 대답한다.
“좋아요”
“그런데 좀 춥지 않을까”
“따뜻한 햇살이 있잖아”
“괜찮아, 괜찮아, 재미잖아”
“그래 가요.”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벌써 한 마음이 되어버린다. 앞서 오르던 사람들은 작은 공원 비탈길을 걷는 동안 종달새처럼 재잘거린다. “낙엽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어 냄새가 더덕 향 같네요!” “그 코 개 코인 모양이다” 라며 농담도 늘어놓아도 좋은 모두가 모두에게 모든 것을 허용할 것만 같은 넓은 마음 푸른 마음 고운 마음이 되어 산길을 오른다.

가을 공원의 초대를 우리는 기꺼이 한 목소리로 응답하고 모두 다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소풍을 간다. 누군가가 노래를 선창을 하니 뒤 따르던 이들도 입을 모아 따라 부른다.
“산골짜기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 번 넘으렴. 파알딱 파알딱 팔딱 날도 정말 좋구나.”

공원 입구부터 울긋불긋 떨어진 낙엽이 지금도 떨어지고 날리는 낙엽이 꽃잎을 뿌리듯 환영하는 손짓하는 것 같아 노래 부르는 목소리들이 들떠 있다. 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결엔 가을 냄새가 코끝을 향긋하게 자극한다. 어렸을 적 아무생각 없이 따라 불렀던 동요의 노랫말의 다람쥐가 되어 포올딱 포올딱 뛰어다니고 싶어진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이 내리쬐는 날 실바람도 불어와 가을 소풍으로는 모두가 더 없이 행복한 아이들이 되었다.

우리는 잠시 햇살이 비치는 아늑한 자리를 잡아 앉는다. 도시락을 하나 둘 풀어놓으니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린 진수성찬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먹는 즐거움 또한 함께 즐기는 축복이다. 나누어 먹는 것에서 평화가 시작된다 했으니까 말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큼 먹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가 또 있을까. 인간은 여는 동물들처럼 배를 채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미식을 찾아다니는 것도 욕심의 한 모습이다. 이렇게 간단한 도시락으로도 삶이 뿌듯하고 행복한데, 너무 많이 식탐을 부리는 것 같다.

동그란 입을 가진 인간의 교제는 동그란 식탁에서

식사에 초대하고 식사를 나누는 먹는 것은 다분히 사회적이다. 사람들은 여간해서 홀로 식사하기를 즐기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같이 함께 나누는 식탁을 통해 한 가족임을 확인하고, 사랑과 이별의 의식을 치를 때나 친구와 우정을 나눌 때, 나그네를 대접할 때, 동료와 사업을 의논할 때도 함께 음식을 먹는다.

내가 바치는 매일 미사도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요 나는 그의 아들이요, 제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둘러선 식탁 위엔 빵과 포도주가 놓여 있었다. 그 빵과 포도주는 그날 예수가 제자들에게 던진 강론의 주요 재료이다. 당장 입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절실한 느낌을 자아내는 강론의 재료가 무엇이녀 또 있겠는가.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손에 들고, 또 먹으며 제자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빵을 들고 바라보시며 “이는 나의 살이다”라고 외친다. 또 같은 모양으로 포도주가 든 잔을 들고서는 “이는 나의 피다”라고 선언하면서 그것이 곧 하느님의 육화된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먹는 존재’에서 ‘먹히는 존재’로 승화한 그 지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시 먹는 것을 택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교회는 그날 그것을 ‘성찬’이라 부르며 나는 죽는 그날까지 그 성찬을 매일 미사로 거행 할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요한6,51) 이 말씀은 ‘먹는 존재’에서 ‘먹히는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러 온 것이다. 우리는 그런 능동적인 먹힘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생명이 생명을 먹는 우주적 순환 질서에 자기를 기꺼이 내어 맡기는 천명을 따르는 행위이다.

니코스 카찬차키스는 소설 <희랍인 조르바>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것을 완곡하게 표현한다.
“당신이 먹는 음식으로 뭘 만드는지 가르쳐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요.”

작가는 여기서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의 신비가 ‘먹히는 존재’인 예수를 통해서 보여준 것이다. 섬기는 사람으로 사는 이들 안에 생명의 빵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풍성한 축복이 된다는 신비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고도 ‘먹는 존재’에서 ‘먹히는 존재’로의 삶의 각성이나 자기 변혁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성가족은 아닌 것이다. 무엇이든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고 욕망의 사로잡힌 이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을 먹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조석으로 떠먹는 밥에서 먹히는 존재가 된 어머니 자연과 옛 성현들을 본다. 자기를 밥으로 송두리째 내주고 피골이 상접한 모성에서, 나는 내가 내딛어야 할 성스런 지향을 본다. 땅과 어머니, 이 위대한 모성의 눈짓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아름답게 여물어 갈 수 있으며, 생명의 향기가 사랑인 줄 알겠는가?

이때 옆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다람쥐와 눈빛을 교환한다. 밥 냄새를 맡고 온 것일까. 놈에게 던져줄 고수레조차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운 것이 못내 미안하고 아쉬웠다. 하지만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먹지 않겠다고, ‘먹는 존재’에서 ‘먹히는 존재’가 되어 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너처럼 소량의 미학을 실천하고 살겠다는 나의 다짐이 허튼 다짐이 되지 않도록 다람쥐야 네가 증인이 되어 다오.

 

 
 

최민석 신부 (첼레스티노)

광주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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