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9]

▲ <‘장엄 미사’를 작곡할 때의 베토벤 초상화>, 슈틸러 작품, 1820년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 ‘합창’과 <교향곡 7번> 4악장 ‘바커스의 향연’을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다니엘 호프는 고전주의 음악을 설명하면서, 추상적이고 어려운 설명보다는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들어볼 것을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곡은 위대한 천재성, 완벽한 형태, 감정의 깊이, 느낌의 풍부함, 즉 클래식의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말했듯이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침묵할 수도 없는’ 소리들이다.”

베토벤은 말했습니다.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커스이며, 그렇게 빚은 술로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

베토벤의 이들 음악과 달리,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 전주곡에 이어 나오는 ‘혼례의 합창’과 <탄호이저>의 ‘순례자의 합창’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며 숙연한 분위기에 젖어들곤 합니다. 곡이 주는 편안한 느낌 못지않게 가사의 의미도 매우 경건합니다.

“믿음에 이끌려 다가가세요. 사랑의 축복이 깃드는 곳으로. 승리의 용기와 사랑의 보답이 하나 된 두 분을 축복합니다.” (혼례의 합창)

“내 고향을 다시 보게 되네. 정다워라 푸르른 초원. 내 마음이 평화로움은 순례자의 길이 끝남이라. 이 죄인의 탄식소리 내 주님께 받아들여졌네. 내 눈물이 희망으로 바뀌었네.” (순례자의 합창)

1933년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실의에 차 있던 독일 국민에게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고,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합병할 것’이라는 나치 당의 목표를 제시하면서 독일의 총리가 되었고, 이듬해 국가원수가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화가가 되려고 미술학교에 여러 번 지원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던 히틀러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실의에 빠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죽음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는 히틀러로 하여금 현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정치인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 시기에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정치인이 되어 바그너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히틀러는 어머니가 죽은 원인은 물론, 전후 독일뿐 아니라 전세계가 불행하게 된 원인을 유대인에게서 찾았고, 이후 정치노선에서 반유대주의를 표명하게 되었습니다.

1923년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히틀러는 군부와 관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무력봉기가 실패하면서 체포되어 육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쓴 책이 <나의 투쟁>이었습니다.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며 그는 대중 선동을 통해 집단 애국주의로 가는 것을 자신이 나아갈 방향으로 정했습니다.

탁월한 대중 선동의 연설가이면서 냉철한 정치인이었던 히틀러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과 제스처는 실의에 가득 찼던 사람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휘어잡았고, 전후 정치적 혼란기와 경제적 침체기를 겪고 있던 독일 국민에게 그런 히틀러의 열정은 냉정함과 분별력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방황하던 젊은 시절, 화가이며 문필가를 자처하고 다니면서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던 히틀러는 독일의 정신과 자유를 상징하던 베토벤의 음악과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한 바그너의 장엄한 악극을 통해 독일 국민의 민족적 우월성과 열정을 구현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히틀러는 음악에 심취했던 만큼 음악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만큼, 그것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군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알았습니다.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은 ‘독일 민족에 의한 제3제국 건설’이라고 하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의 목적을 실현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독일 국민에게 베토벤은 독일의 정신을 상징하는 음악가였으며, 그의 음악은 자유와 이상을 실현하는 민중의 음악이었습니다. 그러한 음악이었기에, 히틀러는 수천 명의 학생들로 하여금 거리에서 공공연히 ‘환희의 송가’를 부르게 했고, 나치 당원들 앞에서, 심지어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도 <교향곡 9번>을 연주하도록 했습니다.

▲ <바그너>, 피에르 오그스트 르느와르 작품, 1882년
바그너의 음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그너는 악극 <니벨룽의 반지>에서 북유럽의 신화를 소재로 하여 게르만 민족의 과거에서 미래에 이르는 과정을 장엄하게 형상화시키면서 예술로 승화시켰지만,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이 처한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못하고,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현실 속에서 재현하려고 했습니다.

즉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에서, 세계 지배를 상징하는 반지를 둘러싸고 신들과 소인들, 영웅들이 치열한 투쟁을 한 끝에 모두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구세계의 몰락과 더불어 도래한다는 것을 그렸다고 하면,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 전후 세계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이끄는 제3제국으로 거듭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가극 중에서도 특히 <탄호이저>를 좋아해서, 제3막 1악장의 ‘순례자의 합창’의 멜로디를 나치 독일의 제2의 국가(國歌)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 학살 현장에서도 이 곡을 틀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은 유대인들과 전후 살아남은 유대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베토벤은 ‘음악이야말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고 말했다지만, 그 언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있었던 것을 보면, 음악가가 생각했던 언어와 독재자가 생각했던 언어가 서로 달랐던 것일지 모릅니다.

‘음악의 내면에 이처럼 파괴적이고 위험한 속성이 잠재해 있는가. 아니면 음악까지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권력이 그토록 위험한 것인가.’ 권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서 떠올리게 되는 의문입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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