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순교성지벨트를 위해서라도 나서야 할 한국 교회

‘도심 속의 은수자(hermit)’, 용산신학교와 원효로 성당은 언덕 아래 새남터 성지가 바라다 보이는 용산의 언덕배기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성당은 한국 가톨릭이 박해시대를 끝내고 용산신학교가 자리 잡은 1890년대부터 격랑의 한국 현대사를 묵묵히 지켜보며 언제나 그 자리에서 도시의 은수자처럼 굽이쳐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가톨릭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옮기기 전 1930년대 한국 가톨릭의 산실이었던 용산 신학교는 제대 아래에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었다. 용산 신학교 학생들은 아침 마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코스트(Coste) 신부에 의해 똑같은 건축 양식으로 세워진, 이 아담한 성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김대건 신부의 정신으로 한국 교회의 앞날을 열어갈 열망으로 깊은 기도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새남터 순교지를 곁에 두고도 한국 교회의 앞날에 대해 묵상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서울특별시 사적으로 지적되어 문화재로 보호를 받고 있는 원효로 성당은 초기 한국 교회의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정자였던 함벽정 자리에는 그 시절부터 서있었던 느티나무들이 100여년 넘게 한국 가톨릭의 정신을 지켜보고 있다. 지금도 이 성당에 들어서면 안온한 예수님의 영성과 한국 초기 교회의 정신을 면면히 느낄 수 있다.

아담하지만 묵직한 역사의 무게로 서 있는 이 성당과 새남터 순교성지 사이에 지하7층, 지상18층의 초대형, 초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 건물 앞에서는 지난 5월부터 매일 성심여고 학부모, 가톨릭 신자, 개신교 신자들이 1인 시위와 서명을 받고 있다.

이 초현대식 건물은 올해 10월 입점을 목표로 지난 2010년 6월부터 주민들 몰래 농림부와 마사회가 밀실에서 추진해온 ‘용산 화상 경마장’이다. 가톨릭 성지의 코앞에 탐욕과 욕망의 도박을 부추기는 초대형 화상 경마장이 들어섰다. 이런 일을 추진한 농림부와 마사회의 황폐한 정신과 탐욕이 기가 막힐 뿐이다.

학부모와 주민들은 위장업체를 동원하여 지역주민들 몰래 이 건물을 신축해 온 사실을 건물이 완공된 이후인 2013년 5월에야 비로소 용산구 의원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건물의 허가와 신축은 지난 3년간 주민들과 성심여중고에 단 한 차례의 고지도, 공청회도 없이 진행되었다.

지난 5월부터 지금까지 성심학교와 인근 학교 학부모들, 용산 지역 주민들, 용산 지역 기독교 연합회는 이 일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해 왔다. 이들은 15만 명의 용산 화상 경마장 반대 서명을 받았고, 두 번의 입점 반대 참여문화제, 그리고 마사회와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의 국정감사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해왔다.

10월 2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용산구에서 열린 현장시장실의 주민 정책토론회에서 “서울시장으로서 용산 화상경마장 입점을 반대한다. 만약 농림부가 입점을 강행하면 기존에 서울시내에 있는 10개의 화상 경마장 모두를 문제삼겠다”고 주민들에게 약속을 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농림해양수산위와 문화교육위 국정감사에서 이 경마장 입점의 부당성이 국회의원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용산 화상 경마장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해당사자들로 구성된 ‘갈등조정협의회’의 구성이 필요하다. 현행법상으로 용산 화상 경마장 문제와 같은 공공정책으로 인하여 발생한 갈등해결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중앙행정기관의 장인 농림해양수산부 장관은 ‘갈등조정협의회’을 구성하여 운영할 수 있다. <공공기관의 갈등 예방과 해결에 관한 규정> 대통령령에 의하면 중앙행정기관은 사회 전반의 갈등예방과 해결 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종합적인 정책을 추진할 책무가 규정되어 있다.

용산 화상 경마장 이전 결정의 당사자인 농림부와 마사회, 국회 해당 상임위원회의 여야 국회의원, 지역 현안 해결의 주체인 서울시와 용산구청, 그리고 용산구 학부모와 주민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이해당사자의 합의로 문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갈등의 조정자로서 가톨릭과 개신교 등 종교계가 이 협의회에 참여하여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견을 조정할 수 있길 기대한다.

가톨릭교회는 교황청이 인정하는 ‘한국순교성지’를 준비하고 있다. 새남터, 당고개, 성심학교의 용산신학교와 원효로 성당, 절두산 성지, 서소문 성지를 잇는 성지순례벨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 순교성지벨트의 한 가운데, 지상지하 25층의 초대형 화상 경마장을 세우는 것은 세계적인 망신거리가 될 것이다. 이 순례지를 방문하는 국내외 사람들에게 이 건물은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의식과 얕은 한국정부의 문화의식을 드러낼 것이다. 용산 화상경마장 문제해결을 위해 한국 가톨릭교회가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임채원 (패트릭)
용산 화상경마장 대책위 고문, 서울대 국가리더십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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